경희대 청운관에 갔다.
혁신학교연구 중간 발표와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방과후 수학반 A반만 수업을 하고
바로 경희대로 향했다.
지하철 경로 검색을 해서 낙성대-사당-이촌-회기 경로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보니 원체는 1시 30분 경에 마치고 45분 쯤에는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결국 2시를 넘기고 말았다. 문제를 다 해결하기 위해서 그랬다.
낙성대에 2시 15분 사당에 25분 이촌에 30분, 그런데 중앙선 열차가 28분에 지나갔다.
15분 정도의 간격으로 운행되는 관계로 다음 차는 43분에 있었다.
서울역으로 가서 1호선을 갈아타는 것보다는 중앙선의 낭만을 즐기기로 했다.
시간도 더 걸리는 편이 아니어서 안면을 시리게 하는 추위 속에서도 15분 정도를 견디기로 했다.
안샘과 메세지를 주고 받았다. 안샘은 벌써 경희대 쪽으로 가고 있었다.
회기 역에 내려서 경희대 방향으로 나가 1번 마을 버스를 탔다.
경로를 알고 있었다면 그냥 걸어가는 것이 더 빨랐을텐데...
3시 20분 경에는 청운관 601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분들이 오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발표를 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이 분야에서 쟁쟁한 명망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청도에 계시는 초등학교 신 샘 같은 경우에는 충청도 교육은 물론이고 교육과정 계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한 자락 하시는 분들의 강의를 들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1시간 분량의 강의들을
겨우 15분 정도에 다 소화하고 내려가라고 하니 강사들은 아쉽기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분들은 벌써 연구팀으로서 지난한 토의들을 해오신 분들이라는 감이 왔다.
교육철학, 교육방법론의 변화
비고츠키라는 러시아 교육학자(유태계 러시아인)의 이론을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새롭게 수립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피아제의 발달론과 개인구성주의를 넘어서 비고츠키의 사회구성주의라고 할까...
교육철학, 교육과정, 수업론, 장학론, 학교문화론, 교육행정론 등
전체적인 혁신 마인드의 기본을 훑어서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토의 시간에 혁신학교라는 정치적 구호를 대신해서 [정상학교]('좋은 학교'라는 말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너무 막연한 것 같아서...)를 지향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제언을 했다.
현실의 학교는 비정상이니 그 문제점들을 찾아내고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서 다양한 논의와
연구와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며 결국 전체적인 교육의 질을 높이고 학교 문화, 내지는 교육문화를 개선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도 하루 아침에 학교를 바꾸려는 시도보다는 꾸준히 교육역량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학교에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교육되어지므로 전체적인 수준과 질이 향상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꿈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무 당연하지만
너무 막연하고 파당성이 없는 그런 무색깔의 정론에 불과한 것을 잘 안다. 그래도 나의 그런 제언에
박수를 치면 동의하는 샘들이 계셨다. 또 다시 정치적인 구호에 의해서 학교 현장을 흔들다가 시들어버리는
그런 악습을 되풀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파당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변증법과 유물론을 거론하고 [생태, 민주, ...]라는 가치로 현상의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혁신하려고 하는 주체들의 노력과 헌신을 높이 사야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어가면
정치적 파당성이 금방 노출되고 거기에 기초하지 않은 다른 노선과 운동들은 아마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민중적 파당성을 정의라고 생각하고 몰입하면서 전체를 살리려고 하지만
그 논리에 의해서 어떤 혁신이 가능하게 될 지라도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다 덮어야 함이 이 입장의 논리적 모순이다. 그 부분을 전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 부분적 동인이 역사의 정당하고 유일한 동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존재의 기반을 부정하라는 것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이런 파당성에서 자유함을 가지고 전체를 보고 역사의 정당한 동인에 근거해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는가?
교육이 교육관료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결국 교육운동 주체들의 파당성에도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해서
자신을 부인하는 겸손에 이르를 수가 있겠는가?
요원한 문제이고,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하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마치 만병통치약을 제공하는 듯한 착각 속에서 거기에 몰입하고 자신은 순진 무구한
어린이들 처럼 때묻지 않은 전사요 구원병이라고 생각할 때 교육의 파당성의 암은 깊어만 간다.
혁신의 밤은 깊어갈 것이다. 그나저나 바른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교사가 무슨 바른 교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