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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바라보아도 가로 막히는 것이 없을 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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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의 문에서 행하는 사명에 대해>

 

-존재의 지속이 대부분의 활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존재의 발현으로서 노동이 그 일을 감당하게 한다.

먹는 것을 위한 노동, 입는 것을 위한 노동, 잠자고 쉬는 곳을 위한 노동

그리고 그것의 연장으로서의 산업

 

-먹고, 마시는 일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를 유지하고 보전, 성장하게 하는 일로서

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본체적 속성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일에서

나타나고 발현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거룩한 성전인 교회가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신이신 성신께서 임재하시고 충만하시사 발휘하고 장성하고 발현하게 하는

이 영광을 사모한다.

 

-삶의 의미와 그 목표와 방향을 말하고 그것을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는 것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 나아갈 일이다.

이 엄숙한 삶의 현실을 바라보며 그것에 매몰되거나 그것을 무시하여 허공을 맴도는

그런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뒷짐지고 구경하시는 방관자가 아니시다.

그 아들을 내어주시기 까지 이 거룩한 경영을 이루시기 위하여 힘쓰시는 전능자이시다.

오호! 전능하신 분의 그 연약함이여!


우리 인생의 근본과 그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이야기하거나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이 시공간속에서 영원의 나라에 속하여 현재를 살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정말 큰 신비이고

인생살이의 비빌인 사실을 계시를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겪게 되는

이 다양하고도 복잡한 경험을

생각하고

어머니의 배속에서 잉태되어

태속에서 자라나고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자라고

스스로 걷고  뛰고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서가되

혼자만이 아니라 거룩한 사회의 한 지체로

서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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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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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잠자리에 누워서 눈이 뜨면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기도하는 중에
그 크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으로 비천한 자리에 오실 수 있는가?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정말 능력이 어디에 있는가?
보통은 큰 빌딩이나,

멋진 예술 작품이나,

기가 막힌 듯이 만들어진
그런 공예품들을 보고서 놀라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낮아지신 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생각하는 것이 인간나라입니다.

왜 그분이 낮아지셔야 했는가? 무엇을 하셨는가?

저는 참으로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교사로서 2002년을 보내면서
정말 무너지는 자신을 주저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
자신이 능력있는 사람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겸손하게  아무런 실력이 없는 자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실력없는 자로서 그다음 어떤 행동을 하였는가?

자신안에서 능력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쌓고, 무엇을 쌓고, 무엇을 쌓고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된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이 어두운 세상에 쇠하지 않는 생명,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그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밤하늘의 그 깊은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렇게 크신 하나님이시지, 가슴이 뻥 뚫립니다.

아, 나는 무엇을 바라며 사는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고 계수하여 보게 하신 하나님,

하늘의 별같이 그 후손을 많게 하리라고 언약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그 하늘을 날아다니는 정교한 우주비행선을

만드는 것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능력은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하게 되시어,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거기에 참된 생명의 능력이 역사하는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살았는가?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상이 아니신 하나님
사람의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니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셔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참되신 하나님,
내가 찾고 싶으면 찾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고
내게 찾아오신 하나님,

내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신 하나님,

그 크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바르게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 어둔 세상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를 원합니다.
- 이런 간구도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내가 무슨 능이 있어서

추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 생명안에 한 지체로 세워주셨기 때문인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해는 정말 반성할 것이 많은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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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는 지식의 보고이다 ?>

19세기말까지만 해도 교사들은 적어도 학문적인 문제에 관해서만은 그 지역사회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지방의 지식의 원천으로서 교사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현대의 여러 가지 사건들은 더 이상 교사의 그러한 역할을 계속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첫째, 지식의 폭발과 지식 변화의 신속성,

둘째, 학생들은 이미 학교에 오기 전에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셋째, 교사보다 정보를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효능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는 현대적 기계매체들이 출현하고 있다.

*지식의 폭발과 변화의 신속성

지식의 폭발과 지식변화의 신속성은 이제 교사로 하여금 소량의 지식 또는 정보만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이해되게 하고 있다. 옛날처럼 모든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지식의 불변성에 대한 신화”) 한때는 학생들의 제기하는 의문에 대답을 못하면 교사들이 그것을 수치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때의 교사들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나는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수치스럽고 어렵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한 교사들은 말하자면 ‘교사는 지식의 보고가 되어야 한다’는 신화의 희생자들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지금과 같이 끝없이 증대되는 정보의 홍수, 그리고 예전에 볼 수 없을 만큼 가속화된 변화의 시대에서, 어쩔 수 없이 좌절과 실패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스스로 설정한 그러한 과업을 이제 인간이 성취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가 않다.

*학생들은 학교에 오기 전에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정보원에 둘러싸여져 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운송수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빨라지면서 사람들이 더 먼 거리를 가고, 또 먼 거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생애를 똑같은 장소에서 모두 함께 모여 살지 않는다. 전국에 심지어는 전세계에 흩어져서 살고, 그리고 어디에 가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닌다. 더 중요한 것은 텔레비전과 영화가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산업의 경영자들의 말로는 미국의 어린이들이 평균 5세가 될 때쯤이면 이미 그들이 처음 6년간 학교에서 보내게 될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을 보는 데 사용하게 된다고 한다.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그들이 어느 곳을 향하든지 간에 정보가 폭탄처럼 밀려오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같은 나이에 자기들의 부모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교사들도 이제는 학생들이 많은 지식의 영역에서 교사 자신들보다도 훨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아주 어린아이들에게서조차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지식의 폭발 그리고 변화의 가속화와 함께, 전통적인 교사-학생간의 역할이 뒤집히는, 즉 오히려 학생이 교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그런 일들이 이제는 대단히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 기계매체가 교사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의 전자 제품의 발전은 또한 지식의 보고로서의 교사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폐멸시키고 말았다.

그러한 전자기기들은 교사들보다 정보를 훨씬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효능적으로 제공할 수가 있다. 학생들은 유엔총회에 직접가지 않고도 텔레비전으로 참석할 수가 있다. 그들은 영화를 통하여 남북전쟁의 애국자들과 함께 나란히 보스톤의 벙커힐 전투를 할 수 있다. 또 그들은 인공위성으로 제왕의 대관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온갖 사실과 통계숫자들이 각종 시청각 기재를 통하여 훨씬 근사하게 제시될 수 있다. 도서관에서는 마이크로 필름에다 정보를 담아 두었기에, 이제는 누구든지 본래의 신문 기사 그대로를 읽을 수가 있고, 또 루즈벨트 대통령의 노변한담을 오디오 테이프로 직접 들을 수 있다. (이 글은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가속화 되기 이전의 글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보를 전달하는 일에 있어서 교사가 어찌 그러한 전자기기들과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겠는가?(정보 전달의 문제에서도 효율적으로 그리고 전체를 꿰뚫어 보게 전달할 수 있다. 몇 십년간의 노력으로 얻어야 할 통찰력을 교사의 강의를 통해서 얻을 수 있고, 보지 못하던 것,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가르친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그저 지식을 제공 전달하는 것이라면 이제 교사의 역할은 폐멸되다시피 하였다.

교사는 알고 학생은 모른다는 가정은 교육체제의 기초로서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은 가르친다는 것은 뭐 특별한 기능이 필요 없는 것으로, 그래서 누구든지 가르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만약 가르친다는 것이 정보의 전달로 그렇게 단순히 정의된다면 그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에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이유들이 많다.

가르친다는 것의 현대적인 개념은 교사의 역할을 학습과정의 한 조장자로 보고 있다.

그것은 교사의 기능을 조력자로서, 보조자로서, 안내자로서 그리고 사회의 우정어린 대표자로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사는 반드시 모든 해답을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학습의 과정을 어떻게 조장하고 촉진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잘 해내려면, 물론 교사들은 풍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학생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광범한 이해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학습과정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학교의 목적 및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한 적절한 신념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러한 이해를 갖춘 다음, 그들은 학생 하나하나가 각자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도록 돕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통정하는 창의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일반 대중이 오랫동안 생각하여 왔듯이 정보는 누구든지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에서는 진실로 교사라는 전문가만이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교직이라는 전문직이 생존하려면, 지식의 원천으로서 교사에 대한 신화부터 씻어버려야 한다.

교직은 이제 그 기능과 목적을 재규정하여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일반 대중 앞에 교사의 존재 이유를 보다 더 잘 제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교실, 실험실 또는 현장 등 교육이 이루어지는 모든 장소에서 하루하루의 교육을 해 나가는 데 보다 충분한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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