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샘의 글은 생기가 있다. 살아움직인다고 할까? 무엇보다 자신의 일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 어렵지 않다. '우리 아이들에게 바르고 깨끗한 우리 말을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게 하면 된다.'
물론 그것을 이루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목표는 선명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뻔한 사실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그대로(본 대로, 자기가 행동해야 할 처지에서) 말하려고 하지 않고
공연히 어렵게 풀이해 보이려고 할까? 글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어디 서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남들이 써 놓은 책을 읽고 거기 나온 생각이나
틀을 빌려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보통 병폐가 아니다.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책은 인류가 낳은 가장 높고 귀한 문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가장 값진 활동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에는 책과 교육이 일으키는
해독이 엄청나게 크다.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은 사람의 품성을 고귀하게 하고 아름답고 참된 삶을 몸으로 익히는 길을
완전히 내동댕이쳐 버렸다.
교육은 포악한 힘으로 아이들을 모조리 붙잡아 가서 방 안에 온종일 가두며 만드는 거짓 흉내와 잡동사니 지식과 허섭쓰레기 같은
관념과 자기 모멸과 노예근성을 오직 책으로 배운다.
이런 형편에서 그래도 어쩌다가 귀한 자기 생명을 지키면서 끝까지 버티던 아이들, 깨끗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던 아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거친 행동을 하다가 그만 꺾여버리고 만다.
한편 재주를 잘 부려서 어른들한테 칭찬을 받고는 모든 짜여진 틀에 잘도 길들어 가는 아이들만이 겉으로 보기에 아무 탈없이
학교를 마치거나 그럭저럭 남 위에 올라서서 출세 길을 가게 된다.
아이들에게서 삶을 빼앗아 버린 우리 교육은 두 가지로 다른 재주꾼을 만들고 있는데, 그 하나는 손재주 기능공이다.
세계 기능공 올림픽 대회에서 우리 나라가 벌써 몇 번째 일등을 했던가. 창조 재능을 뻗어나게 하는 교육은 하나도 없고
오직 기계처럼 되풀이하게만 하는 훈련만이 있는 교육에서 그래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면 이런 손재주를
보여주는 기능공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또 하나는 말재주꾼, 글재주꾼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글이란 처음부터 말에서 나오고, 말은 삶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삶을 빼앗아 버리고 책만 읽어서 말을 배우고 글을 쓰게 하고 보니 아이들 말과 글이 뿌리가 없이 하늘에 뜬 것으로 된다.
아이들 글이 살아 있는 말이 아니고 머리로 꾸며 만든 글, 거짓스런 흉내를 낸 글로 되어 있다는 것이 어른들 글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이오덕,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20~24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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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삶에서 말과 글이 나와야 한다는 논지를 과감없이 받아들인다.
오늘날 삶의 부허함이 어디서 오는가? 존재의 의미를 돈의 유무에 두고 돈의 많고 적음에 훌륭함과 천박함이 가름되는 시대이다.
그냥 사람의 존재 자체가 가치있다는 것도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이면 다 가치있는가? 사람다워야 가치가 더 상승하는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려는 교육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 이것을 찾기 위해 인류는 그 오랜 세월동안 학문과 문화와 경제, 종교가 한 쌍을 이루어 추구해 왔다.
어디서 사람다운 사람을 찾을 수 있는가?
결핍과 결손이 심하다. 사람다운 사람이 없음으로 그냥 사람다운 척 하는 사람이면 사람다운 사람으로 여겨준다.
그래서는 안되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을 보고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며 살기를 기뻐하셨다.
그런데 사람은 거짓된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였고, 결국 사람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존재의 무와 부정에 종노릇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사람의 헛된 추구를 끊임없이 노출시켜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속내를 보이셨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오셨고, 그가 사람으로서 사시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성소인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당하시고 치르셨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되
그 속내를 아는 아들이 죽임을 당함까지 가게 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교차하는 곳이 하나님의 성소이다.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에서 거짓된 사람은 죽고 새로이 의를 입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살아난다.
그리하여 부활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의 몸을 입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그래야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
해 아래서 헛된 수고로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비참하다. 끝이 죽음이다. 죽음을 향해서 달려갈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생명을 이야기해본들 무슨 씨알이 먹히겠는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 인류의 큰 정신적 자산으로 남는다고
혹자는 말하면서 영생을 말한다. 영원히 인류와 함께 산다고 한다. 혹자는 화학적 분해를 이야기하면서 영원한 물질로
남으니 죽음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유일한 인격성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상도 벌도 없다면 그 수고야 말로 헛되고 헛될 뿐이지 않는가?
참으로 고귀한 사람이 무로 돌아가니 그것처럼 허무할 수 없다.
부활의 몸, 영원한 생명,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사귐을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는 사람
누가 이것을 꿈꿀 수나 있는가?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이다. 어찌 이런 일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참으로 놀라고 깜짝 놀라고 뒤로 자빠져 다시 깨어나도 놀랄 일이다. 여기에 참 교육의 의미가 있다.
사람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주부가 그 허드레같은 주방의 일들을 하나씩 깨끗하게 처리하면서 누릴
기쁨이 있다. 일용직 노동자가 하루 품삯을 위해 땀흘려 일하고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아이를 잉태하여 뱃살이 터지도록 아이를 품고 기르다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아이를 낳고 기뻐하는 이유가 있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하지만 얻어 터지고 넘어지고 어둠에 묻히다가도 다시 일어서서 햇빛을 보고 본향을 찾아서
나아가는 이유가 있다.
누가 그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을 찾는 자가 찾을 수 있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
어디에 문이 있는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