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초가을 풍경

 

Teachers never stop learning.

I'm not working for a school but everyday I learn something new.

 

경주로 가는 KTX안 옆자리 Cris와 2시간 동안

free talking~*

올 여름의 문예창작 여름방학 직무연수는

어린이 문학 감상 교육을 통한 창의인성 기르기입니다.

8/10~12.

첫째날과 둘째날은 서대문 경기초등학교에서 문학교육 강의를 듣고요,

세째날의 문학기행은 윤동주 만나기와 망우사색길 산책입니다.

 

이미 46명의 초등교사가 연수참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버스를 두 대 예약하였으니 주변분들께 안내하시고 참가의사를 댓글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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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수 계 획 서

서울초등문예창작교육연구회

 

1. 연수 종별 : 직무연수

2. 연수과정명 : 어린이 문학 감상 교육을 통한 창의인성 기르기

3. 연수과정 구분 : 전문성향상과정 (교과지도)

4. 연수 장소 및 연수 인원 : 40× 2= 80, 경기초등학교

5. 연수 기간 : 2016. 08. 10. ~ 2016. 08. 12. ( 3일간 )

6. 연수이수시간 : 15시간

7. 연수 목적 : 어린이 문학 감상교육을 통한 창의 인성 기르기의 장을 마련하여 교원들의 문학적 소양 을 기르고 다양한 교실수업 개선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함.

8. 연수 방침 : 여름방학 직무연수(15시간)

9. 과정별 교과 편성

교과목

교수요목

시수

수업방법

강의

참여

실습

어린이 문학 감상 교육을

통한 창의인성 기르기

-공감, 나눔, 소통, 배려-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세계 및 동시

동시 감상과 쓰기 지도의 실제

동화 읽기와 쓰기 지도의 실제

하브루타 동화 읽기

 

3

2

2

2

문학기행 (서울)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기념실

망우 사색의 길 탐방

6

 

 

10. 세부교과 진행표

어린이문학 감상교육을 통한 창의 인성 기르기: 2016. 08. 10. ~ 2016. 08. 12. (3일간)

교시

날짜

 

1교시

2교시

3교시

4교시

중식

5교시

08:3009:00

09:0009:50

10:0010:50

11:0011:50

12:0012:50

12:5013:30

13:3014:20

1

( 810)

등록 및

개강식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세계

윤동주의 동시

동시야, 놀자

 

동시야, 놀자

담당자

김응교 교수

김영 시인

 

김영 시인

2

( 811)

문학기행

안내

동화 읽기와 쓰기지도

하브루타 동화읽기

 

 

담당자

송재찬 작가

최대규 수석교사

 

 

3

( 812)

08:30분 집합후 이동

오전 09:00~12:00

윤동주 문학관(종로구 창의문로 119)

윤동주 기념실(서대문구 연세로 50 연세대 내 핀스홀 2)

전문 해설사 강의

3( 812)

오후 12:00~13:00

중식, 이동 강의시간 포함하지 않음

오후 13:00~16:00 강의

* 망우 사색의 길 탐방(서울 중랑구 망우동 75-1)

<사색의 길의 인문학>

-방정환, 박인환, 한용운 등 우리나라 근대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김영식 작가, 박종평 작가 진행

11. 연수비 입금 계좌번호 및 예금주 : 6.5만원 농협 302-0947-0997-71 박정미(초등문예창작)

 

 

출처 : 백미문학
글쓴이 : 맑은샘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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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113쪽

<굴종인가, 사랑으로 섬기는 것인가?>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의 셋째 질문

 

"그대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전심으로 그분을 섬기고......

살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분을 섬길 수 있으며 또한 섬겨야 한다.

요점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섬길 것인가 이다.

114쪽

하나님이 섬김을 받으셔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서기관들 사이에서도

결코 논쟁이 된 적이 없다. 그것은 쟁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섬김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주님과 그들 사이에 날카로운 논쟁이 있었다.

이렇게 대립이 격화되자,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주님의 이 부르심을 가리켜 '인생의 근심과 어려움에 지친 사람들과 죄 짐에 눌려 낙심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라고 이해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우선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사람들에게 부과한 어렵고 무거운 '의무들'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의무들로 인해 여러 가지로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이 백성에게 부과한 의무들이 금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얼마나 큰 어려움을 주는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강압적으로 의무를 완전하게 수행하라고 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억눌렀다. 특히 그들은 백성에게 어떠한 마음의 평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백성들은 위로와 확신을 모두 빼앗겼다. 그들은 일평생을 자신이 수행한 의무들이 충분한지에 대한

불확실한 가운데 살았으며, 삶을 평가할 저울 눈금이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지 불안해 하였다.

115쪽

그러므로 구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짐이 무거우면 나에게 단순히 오기만 하여라. 내가 너에게 쉼을 주겠다.

너에게 부과되었던 짐들을 풀어 주겠다'고 하신다. 바리새인들은 무거운 멍에를 가지고 왔으면

사람들은 그 아래서 짓눌렸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

 

주님께서 주신 짐이 쉽고 가벼운 이유는 그 의무들이 광범위하거나 철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계명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어렵고 불확실한 것으로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근간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과 구원의 확실성이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 아래서는 그 의무가 힘들고 노예 생활과 같은 고역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아래서는 그 의무가 즐거운 것이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되었다.   

 

<셋째 질문은 요리문답의 제3부와 비슷>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의 셋째 질문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3부는 아주 흡사하다.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은 둘째 질문에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자기를 미워하는지 그리고 여러분의 생명을 여러분 밖에서 곧 그리스도에게서만 찾는지'를

질문하고, 이어서 셋째 질문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 묻는다.

116쪽

이와 유사하게 요리문답은 우선 우리의 비참함을 말하고,

그 다음으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말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제3부에서는 우리의 감사에 대해 말한다.

 

잠시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에게로 돌아가 보면, 그들은 다른 순서를 선호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순서상 맨 앞이었다.

그들의 교훈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길을 진척시키고

또 유지하여야 했다. 실제로 그들의 가르침을 보면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를 다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들이 그 일에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께 자신들을 구원하셔야 할 부담을 가중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섬김을 가리켜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고 말한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5)

하고 묻는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바울 시대의 유대주의자들과 후대의 로마 가톨릭은 모두 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구원을 이루어 낸다. 그 섬김 가운데 여러분이 열심히 행하는 선한 일들이

여러분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인 바울의 교훈을 따르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감사로 인해 선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17쪽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셨고 이제 그분의 성신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은 우리에게 감사의 '이유'만을 준 것이 아니다.

그분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또한 그분의 성신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우리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시었다.

 

<감사는 신자의 삶에 본질적인 것>

이런 감사의 섬김은 신자의 삶에 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히 12:14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감사에 대한 부분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묻고 답한다.

 

87문 "감사치도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을 계속 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118쪽

고전 6: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신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전심으로 원한다고 고백하십니까?>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의 셋째 질문에서 '전심으로 원하는가?'에 대하여 묻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을 보면 "그대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언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느다. 다만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렇게 행하기를 원하는가'를 묻고 있다.

119쪽

이 질문은 인생의 가장 깊숙한 영역인 '마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시편에서는 그러한 것들, 즉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잠언의 말씀을 들어보자.

잠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주짐은 우리로 마음에 있는 그릇된 욕구들을 간과하게 놔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주님의 계명을 구약보다 더욱 날카로운 잣대로 우리 앞에 두신다.

주님은 '나는 마음을 본다. 네 마음은 나와 나를 섬기는 일을 향하고 있는가?'하고 말씀하신다.

120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해설하는 마지막 부분(114문답)을 보면,

이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114문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이러한 순종을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일부 계명만이 아니라

        모든 계명에 따라 살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전심으로 갈망하는 목표를 열심히 좇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문답은 그다음 질문에서

".......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엄격히 십계명을 설교하게 하십니까?"하고 묻고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 성신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문 답)

 

마음으로 간절히 찾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하고 말씀하셨다.

121쪽

그리고 이 땅의 보화와 하늘의 보화가 다른 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 땅의 보화는 일시적이고 좀과 녹이 다 먹어 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반면에 하늘의 보화는 영속적이다. 우리가 이 땅의 보화들을 추구하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보화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상과 욕망의 근원인 우리의 마음은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늘의 보화로 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 하늘의 보화들 안에서만 우리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지는 이것이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가?'

요리문답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사람의 참된 회개와 회심을 이야기할 때에,

옛사람과 새사람을 이야기한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든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또한 점점 더 그런 죄를 미워하고 피하는 것을 말한다.

새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고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88-90문)

122쪽

그것은 곧 자신의 죄악을 진심으로 후회하며 주 하나님을 섬기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마음'을 주께 드리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기를 원한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

셋째 질문에서는 섬김과 사랑을 함께 언급한다.

 

"그대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전심으로 그분을 섬기고,

 세상을 버리며

 그대의 옛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서

 오직 성신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섬김은 사랑의 섬김이다.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는 단지 사랑을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있어야 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쉽다. 아모시 시대에 사람들은 시온의 노래, 즉 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공의를 쓴쑥으로 바꾸었다.(암 5:7)

123쪽

그들의 공의를 사랑을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쓰라림을 가져왔다.

암 5:12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사회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공의를 지키는 자들을 대적하였다. 돈이 없는 사람은 공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뇌물을 받았으며 비리의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신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3)

그보다 조금 앞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암 5;21)

 

사랑을 행하지 아니하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노래나 기도로 사랑의 단어들을 표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계명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노래하고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께는 불쾌한 사람일 뿐이다.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그분을 섬기고" 하며 고백하는 것은 모호한 선언도 아니고

그저 친밀함을 나타내는 말도 아니다.

이러한 고백은 진셈에서 우러나는 갈망이며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계속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124쪽

이것은 단지 선한 의도만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반응하여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여호수아가 그 말을 했을 때, 이 말은 대립되는 양날을 가진 선언이었다.

'주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든지 하라'

당시에 우상들은 종류가 무척 다양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를 섬기겠노라!' 

 

 

 

 

 

 

 

 

세례반에서 성찬상으로(9)

 

9 그대의 생명을 그대 밖에서

103쪽

<'찾으시겠습니까'와 '발견하셨습니까'>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의 둘째 질문에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미워하는지를 물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우리 밖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것인지에 대하여도 묻는다.

 

"그대의 생명을 그대 밖에서,

곧 우리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으시겠습니까?"

 

104쪽 '찾는다'는 단어는 확실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에게도 '찾고''발견하는' 일은 하나였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나를 찾을 것이고 나를 발견할 것이다"(렘 29:13)

 

예수님

마 7:7 "찾으라. 그러면 찾을(발견할) 것이요"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자기의 구원을 자기 밖에서,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저 어떤 막연한 암시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오직 그분에게서만>

105쪽

생명을 우리 밖에서, 즉 유일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고 고백할 때에,

우리는 그분께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한다.

'유일하신 구주'라고 할 때는 다른 어떠한 소위 '구주들'과 '구주의 경쟁자들'과 '구주의 조력자들'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 43:11)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에 이렇게 선언하셨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또한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신을 구주라고 불렀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자신을 구주로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건설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안에서 세계를

안전하게 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구주로 숭배를 받았다.

위대한 로마 제국의 모든 백성들은 그의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신령한 통치로 인한 것들이라고

고백하여야 했다.

백성들은 황제들을 볼 때에, 신적인 영예를 돌려야 할 위엄이 있는 전제 군주이자 정복자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을 자신 안에서 찾지 않고, 다른 어떤 사람들 안에서도 찾지 않으며,

오직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는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분을 떠나서는 구원도 실제적인 형통함도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쟁의 지배와 난폭한 위협들로부터가 아니라, 죄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일관성 있는 고백>

107쪽

자신의 밖에서 생명을 찾을 때에 우리는 일관되고 철저해야 한다.

주님께서 진실로 충만한 구원을 소유하신 구주이시라면 그분은 우리를 완전하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죄의 권세로부터 단지 '영혼들'만이 아니라 '육체들'도 구원하신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몸과 영혼을 함께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 무언가를 기대하면서도 '육체'를 위해서는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자신의 정신적 재능과 의지적인 능력과 육체의 힘을

의존한다면, 결국 우리는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사람들 안에서 혹은 교회의 기둥들과도 같은 대상에서 우리의 구원을 찾거나

주님의 나라 안에서 행하는 자신의 행위들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면 우리는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완전함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08쪽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밖에서,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그분 안에서 찾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아직 완전함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도 시인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삶 전체가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여전히 주님의 은혜와 무관한 듯이 살아가는 영역이 많이 있음을 고백한다.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뿌리 뽑혀야 할 고집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아간 정욕이 살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성신님을 의지하여 정복하여야 할

나쁜 습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참으로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잘라 내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렇게 가지치기를 해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라야 비로소 우리의 삶에서

열매들이 익어 갈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잘라 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주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생명을 우리 '밖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포도나무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109쪽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전에 기도를 드릴 때에도, 우리는 같은 내용을 고백한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성찬 상에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완전하며 의롭다고 선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에 우리는 우리 밖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찾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원래 죽은 자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죽은 자'들이다.

110쪽

그러나 유일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살' 것이다.

 

갈 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도는 자기 삶의 한복판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더 이상 자신이 삶의 모든 일들의 중심축이 되지 않았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의 중심이 되셨고,

그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셨으며, 그의 삶을 지배하는 능력이 되셨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마음과 환경에 역사하시어 그를 인도하시고 강권하시는 분이 되셨다.

바울의 목표는 주님이었고 또 주님과 누리는 교제였으므로,

그의 생각과 일이 모두 그분에게서 출발하였으며,

모든 일에서 주님을 고려하였고,

주님께로 자신의 삶을 맞추었다.

바울의 삶과 그의 하는 일들 속에서 오직 주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셔야 했다.

바울을 모든 것을 주님의 기준으로 평가하였다.

- s. 흐레이다누스.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의 신약교수

 

(아, 이렇게 생각해보니

내 자신의 존재가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중심부라고 생각한다면

우주의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는 내가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 그것도 아주

말단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끊임없이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주장하라고

교육을 받아왔다. 이 세상의 상술, 홍보 매체의 정신은 고객이 왕이다. 즉, 당신이 왕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소비주체로 끌어내고 자신이 아닌 기업을 위한 고객이 되게 한다.

나는 왕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경영 가운데 있어서 그 전체 진행의 한 부분이

되게 하신 사실로 인하여 놀라고 자신을 바르게 돌아보아야 할 그런 자이다.

내가 내세울 것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님이시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요, 가장 높으신 분이시지만, 가장 낮게 되어서 종의 형체를 입어

하나님께 죽기까기 복종하셨다. 그렇게 될 수 있는가? 나는 오히려 가장 낮고 천한 존재로서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자기 것인양

마음대로 처리하고 소모하는 그런 참으로 가련한 자이다.

이런 죄와 죽음과 마귀의 종노릇하는데서 누가 그 눈을 열어서 진실을 보게 하고

그 귀를 열어서 진리를 듣게 하며, 그 병들고 상처난 것들을 새롭게 하여 온전하게 할 수 있는가?

오직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다. 그러니 내가 내세워야할 분은

오직 우리 주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알고 그분과의 사귐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여김을 받고 지금 그렇게 살도록 하시는 지를 깨달아 주님과 교통하며

그와 같이 형제들을 사랑하고 거룩한 몸으로 그 몸의 지체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나아가기를 소원한다.)

신 16:18-17:13

시 82:1-8

 

공의가 시행되는 사회

이스라엘의 재판

고도의 통치 행위, 공평한 법질서로 사회 기강이 확립되고 유지됨

율법에 따른 판단 - 신 16:18

각 성에 상시 재판소를 설치,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라도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됨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셨으므로 이스라엘 누구라도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어떤 억울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판결을 받도록 하셨다.

상급심을 두어서 신17:8이하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두신 곳에 레위사람을 두신 곳과 제사장으로 최고 상급심을 둠

삼17:16 사무엘이 순회 재판관으로 판결

다윗왕과 솔로몬왕도 재판

 

그러므로 재판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하나님의 일

그렇다고 해서 무슨 징조로 신비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전모를 살피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판단

오늘날에비해서는 매우 단순, 재판의 공정성은 재판관의 율법에 대한 지식과 그들의생활 경험과

정직한 증인에 달려 있다.

1)재판관은 어떤 사람인가? 재판관의 자질

2) 재판의 증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3) 재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를 알아야 재판에 대해서 바르게 알 수 있다.

 

1)재판장

출 18:21 재덕을 겸비 -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 뇌물을 받지 않고 자기 이해 관계를 따라서 재판하지 않는 자

신16:19 -20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공의를 좇아서 행하고 외모를 보지 말라.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가난한 자라도 동정하지 말고,

부자의 유익을 얻으려고 하지도 말라.

그러니 뇌물을 받지 말라.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다.

지혜자라도 의로운 자라도 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뇌물을 받으면....

재판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야 이스라엘에 불의가 사라지고 공의가 세워진다

 

출 23:6-9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밝은눈, 명철한 마음으로 재판해야 한다. 거짓일을 멀리 해야 한다.

재판장 자신이나 재판 당사자들에게서 나오는 거짓

출23:1 -3

재판장은 이런 점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재판장의 증언은 재판장이 맑은 정신과 명철한 눈으로 감독하여 재판을 하도록 하고 재판의 증인들이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아야 한다, 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다수를 따라 휩쓸리지 말라, 사람의 환심을 살려고 하지 말라, 증언하는 자들은 항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꽉차서 그에게 유리하게 동정하지 말라.

재판장은 사람을 위해 있으나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여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니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하고, 거짓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신19: 15-19 사건을 확정하려면 그 사건에 대한 2,3증인의 증거로 확정해야 한다. 만약 증인이 1명 뿐이면 미재판결로 남겨두라.

거짓 증인은 그 만큼 벌을 주어라.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에 위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잠25:18, 19:5 거짓 증인 -칼, 뾰족한 살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재판장은 적어도 밝은 눈, 명철한 마음을 잘 사실해서 살펴야 한다.

합법을 가장해서 이웃을 해치고 재판을 그릇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결과 사회 전체를 무너뜨리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이 분명히 서 있는 나라니, 재판은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이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 의로운 나라,공정한 나라로 서게 하신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생활의 준칙으로 율법을 주셨다.

율법 에는 세세한 세목들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재판을 통해서 공정한 판결로 율법에 따른 지혜를 얻도로 하였다.

 

신 16:21-17:7

무엇을 재판할 것인지를 가르친다.

이스라엘에서 제거해야 할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서 무엇을 재판할 것인지를 가르친다.

 

여호와께 드리지 말 것 - 하나님은 가치 없는분이 아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언약을 세우셨다.

그러니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한 어그러진 것을 드려서는 안되고 , 우상을 세우고 거기에 절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에서 누구든지 우상을 섬기면 그것을 제거하여 예배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 재판장이 해야 할 일이다.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면 안된다.

우상은 자기 욕심, 탐심으로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행한다. 여기서 온갖 죄악이 나온다.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탐심에서 나오는 것 -

재판장은 이런 것을 그 사회에서 척결해야 한다.

악한 생각, 간음, 거짓 증거와 훼방 - 이런 것이 우상 숭배에서 나오는 것이니, 우상 숭배를 제거하고 이스라엘을 바르게 예배드리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공정한 사회가 되게 하신다.

 

시 82:1 불공정한 재판장들

 

이스라엘을 죄를 범하지 않고 의로운 사회로 만들도록 하기 위해 재판장과 유사를 두라고 하신 것

우상 숭배를 제거하고 바르게 예배하도록 하여

온갖 불의가 나오지 않도록 재판하는 일이 중요한 것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에는재판장을 세우고 재판을 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이 거룩하고 죄가 없는 사회로 서서 나가게 한 것이다.

세례반에서 성찬상으로(6)

 

-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

 

<질문들의 연관성>

공적 신앙고백의 첫째 질문과 둘째 질문 서로 밀접하게 관련됨

첫째 질문 -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서들 가운데서 가르치는 구원의 참되고 완전한 교훈에 대해

둘째 질문 - 세례 받을 때에 우리에게 표와 인으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

 

둘째, 그대는 세례를 받을 때에 그대에게 표하고 인을 쳐 주신 하나남의 언약의 약속들을 믿습니까?

 

74쪽 첫째 질문도 둘째 질문처럼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것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교회의 생명력 있는 회원이 되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는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의 교리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개개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둘째 질문을 보면, 거기에 언급된 언약의 약속들은 단지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약속들은 믿음과 교리의 중심 내용이다.

HC 7주일 22문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은 보편적이고 의심할 여지없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조항들인 사도신경이 요약하여 가르쳐 줍니다."

 

예식문의 첫째 질문에서 언급하는 신조들 중 하나인 사도신경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요약한 것으로

불리고 있다.

둘째 질문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이라는 표현은 다름 아닌 사도신경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받습니까?'>

75쪽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은 죽음 이후와 관련된 약속들만이 아니다, 현재의 '삶'을 위한 것임을 우리는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 약속들은 공적 신앙고백을 한 이후에만 우리의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우리는 그 약속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기 전에 이미 이 약속들을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출생'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러한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여호와께서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세대 속에서 우리를 아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그분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인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도 언약을 맺으셨다.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76쪽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세례 예식문에서는 구약에서 언약의 약속을 나타내는 위의 구절과 함께

신약의 오순절에 선포된 동일한 언약의 약속을 한 호흡으로 언급한다.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부요함이다. 자녀들은 신자들인 부모와 함께 자신들도 그 언약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된다.

 

<여호와께서 언약을 주도하신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시작하신 일이다.

따라서 이 언약을 가리커 그 기원에서 편무(片務)적인( 혹은 '일방적인') 언약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람과 하나님이 상호 합의하에 언약을 맺은 것도 아니다.

왕이신 여호와께서 주권적으로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으셨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순전하고 선하신  뜻이었으며 값없이 주시는 그분의 은혜였다.

 

<쌍무(雙務)적인 언약>

77쪽 하나님께서는 언약 맺는 일을 주도하신 후에, 그것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두지 않으시고

양방 간의 언약이 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약속하시는 것들을 요구하시며 요구하시는 것들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성부 하나님의 약속>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대한 의무의 반대쪽 면인 언약의 약속을, 세례받을 때에 우리에게

표하고 인 치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고 우리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과 합하셨다.

'나는 너와 영원한 은혜의 언약을 세운다. 나는 너를 내 자녀와 상속자로 입양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모든 좋은 것을 공급할 것이다. 나는 모든 악을 막아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유익이 되도록 만들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돌보신다고 해서 우리가 근심이나 어려움이 없이 마냥 좋기만 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의 일들이 아무리 너를 대적하더라고 너는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항상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하는 뜻이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곤경 중에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79쪽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하늘 아버지의 보호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마치 요새처럼 우리를 둘러싸시고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인도하여 주신다.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약속들은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이 약속은 성부 하나님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성자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에 다음과 같은 확실한 약속을 받았다.

 

"우리가 성자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모두 씻어서 정결케 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시켜 주심을 약속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로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80쪽

'너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몸과 영혼과 네 존재 전체가 나의 교제 안에 참여하게 된다!'

때로는 우리가 스스로 보잘것 없고 힘이 없다고 느끼지만, 그때에도 위로하시는 구주의 약속이 있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었으며, 네가 이 은혜의 언약에 속하였다는 것과 나의 소유라는 것을

너는 확신해도 된다. 너는 이 모든 것을 네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고 하지 말라.

너의 너 된 것은 네 스스로 값을 치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값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성신님의 약속>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의 이름이 성신님의 이름에 연합되었다.

그때 성신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다.

'나는 네 안에 살면서 너를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지체로 만들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네가 가진 것,

즉 죄 씻음과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삶이 참으로 너 자신의 것이 되도록 만들 것이다.'

 

81쪽 우리는 스스로 참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 확신은 우리가 어떻게든 만들어 내야 하는 심리적인 작용이 아니다.

자신을 설득시키는 것으로는 그러한 확신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에서 오는 위로는 성신께서 우리에게 보증하시는 것이며 매일 여호와를 섬기는 삶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믿음>

우리는 성부, 성자, 성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약속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이것이 공적 신앙고백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받는 질문이다.

"그대는......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은 언약의 요구와 연결되어 있다.

 

82쪽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또 신뢰하여야 한다.

'내가 만약 믿지 않았다면 나는 이전의 모든 죄에도 또 하나의 죄를 덧붙였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등을 돌리는 그 죄 말이다'

 

세례반에서 성찬상으로(5)

 

5. 한결같이 이 교훈 가운에서 행하기를

 

63쪽

<신자의 삶은 '인내'의 삶>

공적 신앙 고백 첫째 질문의 두 번째 부분

 

"그분의 말씀에 모순되는 모든 이단들과 오류들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살아서나 죽어서나 한결같이

이 교훈 가운데 행하기를 서약하십니까?"

 

(독립개신교회의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은 이 부분이 조금 다르다.

"그대는 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열복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살아서나 죽어서나 한결같이

이 교훈 가운데 행하기를 서약하십니까?")

 

즉 우리에게 이 참되고 완전한 구원의 교리 가운데서 신실하게 살아갈 것인지,

이 교훈을 끝까지 붙들고 견디어 나갈 것인지를 묻고 있다.

 

64쪽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마치 병사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것처럼 인내하며 계속 싸워 나가야 한다는 뜻.

그러므로 이 견딤은 '적극적인' 것이다.

그저 자신들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꾹 참고 지내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상황에 '맞서서' 포기하지 않으며, 죽기까지 싸우는 것이다.

믿음으로 이 고비를 이겨내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것

(얻는다는 말보다는 목적지에 이르를 것이다라는 표현이 더 좋겠다. 우리가 시간선상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로서 거기에 이르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무슨 좋은

상품을 얻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가 거기에 이르는 것이다.

무슨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것을 견디며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은 아주 적극적인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할 수 있다. )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신자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

 

약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65쪽 사탄의 시험이 믿음의 실제를 드러낸다.

참된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인내는 자신의 임무를 마지막까지 잘 완수해 나가게 할 것이다.

그렇게 인내를 계속 발휘하다 보면, 결국 신자들은 그들의 종착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분명한 것을 가르쳐 준다.

믿음은 모든 난관을 통과해 가면서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계속 작용할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堅忍)이다.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때뿐 아니라

견디어 내기 힘들 때...

66쪽

우선 이 질문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주목하자.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공적 신앙고백을 할 때,

'앞으로 나 스스로 잘 해내고 인내하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신실하게 이 교리 안에 머무를 것입니다'하고 서약한다.

 

'나는 그럴 만큼 강하다'하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여호와께서 신실하시다' 하고 말한다.

 

'한결같이 이 교훈 가운데 행하는 것'과 '끝까지 견디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결국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벧전 1:4-5)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한결같이 행하여 나갈 수 있다.

 

<성도의 견인>

 

도르트 신조 제5장 3조

"이렇게 신자들 안에 거하는 죄가 아직 남아 있고 또 세상과 사탄이 시험하기 때문에,

이미 회심한 사람이라 하여도 그들의 힘에만 맡겨 두면 은혜의 상태에서 견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그들에게 전에 내려 주신 은혜를 자비롭게 확증하여 주시고

또한 강력하게 붙드셔서 끝까지 그 은혜의 상태 안에 그들을 보존하신다"

 

67쪽 성도의 견인에 관한 이 5장의 나머지 부분들을 읽어 보면, 여러분은 거기서

'한번 믿음은 영원한 믿음'이라고 쉽게 말하는 일이 절대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신조는 믿음을 지속해 가는 일과 우리가 배운 교훈 안에 인내함으로 머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 자신들을 보면 얼마나 약한 자들인가!

68쪽

반면에 죄의 권세는 얼마나 강하며, 사탄은 얼마나 교활한가!

어떻게 우리가 그 모든 어려움을 인내하여 나갈 수 있겠는가?

만약에 박해를 마주하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분은 '우리가 자유를 빼앗기는 날이 와도 나는 아마 잘 견뎌 나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성도의 견인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분의 은혜로써

나에게 인내를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믿음은 은혜이구나. 끝까지 믿음은 은혜이구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날그날의 은혜를 매일 구하여야 하며,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허락하신

과업들을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주신 과업들을 가지고 그분의 성신을 통하여 나를 신실한 자로 만들어 가신다.

어려운 상황에 빠지거나 당장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닥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계속 행하실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런 비밀이 여기에 있고 그것이 매일 밥먹듯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소경과 같은 자였습니다. )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살아가기>

이는 또한 우리가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시험을 허락하지는 않으신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69쪽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신의 경지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과업을 수행하기를 요구하시며,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수단들'을 사용하기를 요구하신다.

특히 도르트 신조는 성도의 견인을 말하는 부분에서 이 수단들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도르트 신조 5장 14조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강설로 우리 안에서 이 은혜의 사역을 시작하기를 기뻐하셨듯이,

                              마찬가지로 그 사역을 보존하고 계속되게 하며 완성하시는 일에서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과 묵상하는 것, 그리고 말씀의 권면과 위협과 약속들과 또한 성례의

                              시행을 사용하신다."

(말씀이 무엇인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책에 기록된 어록이 아니다.

 살아계신 분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그 뜻을 보이신다. 그분을 보이시는 것이다.

 어떻게 그분을 알 수 있는가? 무슨 그림으로.............어떻게...........?  말씀 안에서 안다.

 말씀 안에서 그분과 교통함으로 그분을 아는 것이다. 어떻게 말씀 안에서 그분과 교통하는가?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그렇게 한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확고하게 이 믿음 가운데 계속 행하기를 원하는가' 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주일에 드려지는 두 번의 예배에 반드시 꼬박꼬박 참석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그 예배로 부름을 받았다.

여러분은 설교를 들어야 하고 또한 스스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그룹으로도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또한 세례 받은 것을 활용해야 하며 주의 만찬에도 신실하게 참석해야 한다.

그것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끝까지 견인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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