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말- 수업의 ‘그릇’아닌 ‘그륵’을 말한다
교사 스스로 수업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동료 교사와 수업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이곳에서 동료 교사와 수업을 성찰하면서 수업을 잘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야 한다.
여는 글 - 수업 성찰을 시작하며
교사는 다른 직업군이 가지지 않는 위대한 특권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의미 있는 한 사람으로 변화하고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특권이다. 투박한 원석과 같은 아이들이 세상을 빛내는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특권, 겨자씨 같은 학생들이 싹을 틔워 서서히 열매 맺는 것을 보는 특권, 그리하여 결국은 세상을 바꾸어 갈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교사이기에 우리 내면에서는 자꾸만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수업을 잘해 내야 한다’는 외침이 들린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수업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성찰하는 작업이다. 사실 성찰은 수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성찰의 대상이어야 한다.
01 수업을 보며 성찰하기
교사들은 늘 자신이 평균보다는 조금 나은 수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학생의 관점에서 수업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수업을 처음 보는 교사는 수업 장면을 10분 이상 못 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수업을 본다는 것은 자신을 발가벗기는 느낌을 갖게 하는 일이다.
‘수업을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수업 상황에서 ‘교사가 왜 저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교사는 어떤 생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어떤 수업이 더 잘되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교사가 어떤 목적으로 수업을 했고, 그 목적대로 수업이 구현되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수업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모습보다는 학생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 촬영을 할 때 교실 뒤에 카메라를 놓지 말고, 교사가 있는 앞쪽에 카메라를 설치해 수업 속에서 변화하는 학생들의 얼굴 표정을 담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학생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고, 학생들이 언제 어떻게 수업에 몰입하는지를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다.
배움이란, 학생들이 사고를 통해 생각이 새롭게 되어 삶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크게 다섯 가지 수준이 있는데, 첫째는 지식이 학생의 머릿속에 정보로 기억되는 ‘사실적 사고’ 수준이다. 여기서 배움의 수준이 조금 더 올라가면 학생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추론적 사고’ 수준이다. 그 다음에는 학생들이 질문 던진 것을 자신의 배경지식을 총동원하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비판적 사고’ 수준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현재 배우고 있는 지식의 영역과 전혀 다른 영역 간에 통합이 일어나 이를 표현하게 되는 ‘창의적 사고’ 수준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사고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사회를 성찰하면서 행동의 변화를 가지려고 하는데, 이는 ‘성찰적 사고’의 수준이다. 이렇게 학생의 배움을 사고의 수준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학생들에게 현재 어떤 수준의 배움이 일어났는지를 살필 수 있다.
좋은 수업은 배움의 수준도 깊어야 하지만, 모든 학생이 수업 속 배움에 동참할 수 있는 수업이어야 한다. 수업의 진짜 주인이 교사가 아니라 학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선생님들을 현장에서 만나 보면, 단순히 수업 기술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교사의 내면적 두려움 때문에 수업이 잘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동료 교사와 함께 ‘내가 어디서 지치고 쓰러지는지’를 나누며 동료애를 쌓아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이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교육 철학이 뚜렷하다면 상황에 따라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겠지만,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학생과 학부모, 관리자의 언행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느라 학교 안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때 선배 교사들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며 어깨를 다독여 주고 격려해 준다면 후배 교사가 큰 힘을 얻을 텐데, 지금 학교에는 이런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업무에 바쁘고 자기 반 학생들과 씨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결국 수업을 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무너진 내면을 회복시키는 것이 먼저이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혼을 내고, 수업에서 힘들어하는 학생들은 일일이 찾아가 격려해 주기로 했다.
좋은 수업에는 교사의 행위를 일관된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는 수업 철학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02 수업 속 신념을 살피며 성찰하기
사토마나부는 좋은 수업의 기준점을 ‘도약’이라고 말한다. 배움이란 “대상 세계인 사물과 나누는 대화(세계 만들기),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동료 만들기), 자기와 나누는 대화(자신 만들기), 이 세 가진 대화적 실천에 의해,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여행이며, 교사나 동료와 대화를 하고 도구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는 개인의 경험과 능력의 틀을 넘어서는 발달과 도약이다.” 라는 것이다.
교사가 자기만의 수업 정체성을 가졌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씨름하며 수업을 끌어갈 텐데, 정체성을 상실한 수업은 그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학생들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수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수업은 좋은 수업 방법과 수업 자료를 몇 가지 갖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수업을 알려고 할 때 수업은 비로소 변할 수 있다.
진정한 교사라면 내 수업 속에서 학생들에게 교과 지식을 익히고 습득하는 기쁨을 주어야 한다. 수업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주고, 참다운 행복을 누리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조금은 더디고 힘들지라도 내 수업을 입시 점수 올리는 수업이 아닌 삶을 가꾸는 수업으로 변화시켜 가야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영어공부, 수학공부 등을 스스로 하지 않고 사교육에 의존하다 보니.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사교육 없이 스스로 공부하지 못한다.
학교를 지키려면 교사 스스로 학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수업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태블릿 PC나 온라인 강의에서 맛볼 수 없는 배움을 우리 수업에서 주어야 한다. 감각적인 효과로 눈을 사로잡는 강의가 아니라, 교과 지식으로 ‘나’를 만나게 하고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수업다운 수업을 해야 한다. 그 속에서 학교다운 수업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학생들은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배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03 수업 속 관계를 살피며 성찰하기
배움이 있는 수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실 내에서, 적절한 질서 속에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들어 줄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나는 늘 학생들에게 ‘자율(自律)’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자(自)’는 ‘율(律)’이 있어야지만 그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며, 축구 경기가 재미있는 것도 선수들 간에 규칙이 있어 그 안에서 마음껏 경기를 하기 때문임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학기 초가 되면 수업을 하기 위한 기본 경계를 많이 세우는 편이다. ‘종 치기 전에 자리에 앉아야 한다’, ‘선생님이 들어왔을 때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선생님과 친구가 말을 할 때는 들어야 한다’등을 요구하고, 학기 초에는 이 최소한의 경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이 경계가 선생님의 힘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더 나은 수업을 이끌어 가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임을 강조한다.
학생과의 관계에 있어 뚜렷한 철학을 지닌 교사라면, 학생들에게 어떤 경계를 요구하기 전에 경계를 세우는 목적과 앞으로의 효과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 속에서 학생들은 교사의 경계 세우기를 이해하게 되고, 앞으로 그 원칙에 따라 행동하려고 할 것이다.
학습자 중심의 수업을 한다고 해서 학생들의 모든 행동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수업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공의 공간이다. 모든 학생들이 각자의 욕망대로 움직이게 되면 기본적인 질서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수업의 경계라 함은, 수업 속에서 기본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질서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종이 치기 전에 학생들은 자리에 앉고, 수업을 할 수 있는 준비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교사는 제시간에 수업에 들어오고, 교사와 학생 상호 간에 서로의 말을 들어 주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 기본적인 관계가 잘 만들어지지 않으면 어떤 특별한 수업 방법을 적용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통제의 강도를 낮추고 관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수업을 이끌어야 한다. 수업에서 더 중요한 것은 교사의 ‘효율적인 통제’가 아니라 학생들의 ‘살아 있는 눈빛’이기 때문이다.
04 수업 속 대화를 살피며 성찰하기
가르침과 배움은 결코 함께 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준비해서 열심히 가르친 수업이라 해도,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수업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경험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학생들과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대화를 하라고 하면 우리는 대개 말하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대화는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사가 한 명 한 명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을 통해, 학생은 존중받고 그 속에서 경청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발표한 학생의 이야기를 깊게 듣고 그 생각에 공감을 하고 칭찬을 하면, 학생은 웃기 시작하고 다음 수업에도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려 애쓸 것이다.
05 수업 속 내용을 살피며 성찰하기
좋은 수업은 무의미한 교과 지식에 이름을 붙여 의미 있는 지식으로 바꿔주는 수업이다. 수업 속에 의미가 부여될 때, 학생들은 국어 수업에서는 언어를 통해 나와 대화하고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알게 되고, 수학에서는 수가 가지는 질서와 체계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역사를 통해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을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게 들 것이고, 미술을 통해 선과 색이 주는 아름다움에 심취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 우리의 수업에서는 좀처럼 이런 의미가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과 수업이 정보를 나열하는 수업으로 왜곡된 채 차가운 정보만을 전달할 뿐이다. 학생의 마음에 울림을 주지 못하는, 영혼 없는 수업만이 우리의 곁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교사가 먼저 삶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학생들에게 어떤 고민이 있고, 이 시대에 어떤 문제가 오고 가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또한 삶의 성찰은 단순히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표현과 함께 해야 한다. 표현해 내지 않으면 삶에 대해 고민만 하다가 오히려 괴로워할 수 있다. 표현을 통한 내면화 과정을 통해 성찰의 결과물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신영복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거리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슴에서 발과 손으로 가는 거리’라고 했다.
비계 있는 수업을 하려면, 먼저 학생들을 배려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지적 수준을 고려하여 적절한 순서로 생각을 확장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사고의 단계를 마련해 두는 것이다. 그 단계는 ‘사실적 사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글을 읽고 내용을 확인하는 단계이다. 그런 다음 ‘추론적 사고’로 넘어가, 상식 수준에서 의문을 품고 ‘왜?’라는 질문을 하게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추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한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합리적인 대답을 스스로 찾게 한다. 정확하게 개념을 정리하게 하고 논리적 근거를 찾게 한다. 마지막으로는 ‘창의적 사고’이다.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으로 연결하여 창조적인 적용을 하게 하는 단계이다.
06 수업 친구와 수업 성찰하기
참 희한한 것은 그곳에서 특별한 것을 배우고 오는 것도 아닌데, 모임에만 갔다 오면 수업을 다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얻고는 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현재 상황 속에서 조금 더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뀔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해 주었고, 교사들은 더욱 큰 열정을 가지고 동료 교사와 함께 자신의 수업을 바꿔 갈 수 있었다.
‘수업 친구’, 참 좋은 말이다. 인디언 문화에서 ‘친구’란 남의 무게를 대신 지어 주는 자라고 한다. 그만큼 친구는 팍팍하기만 한 현대인의 삶 속에서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
“괜찮다, 신규 때는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선배 교사들이 있었다. 그때 그 선배들의 지지와 격려가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 나는 교단에 서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동료 교사들 간에 서로 지지하고 위로하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자는 것이다.
우리가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떨 때 마음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대화를 통한 성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업 친구 만들기’ 역시 바로 이 수다의 힘을 통해 마음의 위로를 얻고 수업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 준다.
배움은 천천히 이루어질 수도 있으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모든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되 학생의 상황을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자.
교사는 수업을 열어야 한다. 아무에게나 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친한 동료 교사 한 명에게는 수업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진솔한 수업 나눔을 시작하면서 수업에 대한 깊은 고민과 아픔을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제는 좋은 연수와 자료 찾기에만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평생 나의 고민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수업 친구를 찾아야 할 때다.
07 수다 떨며 수업 성찰하기
수업 코칭에는, 교사 스스로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해 주고 수업의 철학을 세우게 하는 ‘교사의 철학’영역, 자신의 분노와 화를 잘 조절하거나 타인의 감정을 읽고 공감하게 하는 ‘교사의 내면’ 영역,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분석하고 해석하게 하는 ‘수업 분석’ 영역, 수업 내용을 교육과정에 맞게 재구성하여 매력적이고 위계 있는 내용을 만들게 하는 ‘수업 기획’ 영역, 내용에 맞는 교수 방법을 선택하여 학생들을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교수법’ 영역이 있다.
수업 기술을 알려 주는 것보다는, 수업을 하고 있는 교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 교사가 수업에 대해 어떤 내면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먼저이다.
같은 동료로서 따뜻한 시선으로 수업을 한 교사의 마음을 잘 읽어주고 자신이 본 수업 장면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면 된다.
배움에서의 소외라는 것은, 수업이라는 공간 속에서 학생들이 배움에 들어오지 못하고 단절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말한다. 배움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되면 그 학생은 수업 시간에 무기력함, 고립, 자아 소외 등을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면 수업을 잘 들으려 하지 않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게 되고, 점차 학교에 나오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목적 없이 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수업에서 소외되는 학생이 없으려면, 교사가 수업 속에서 최대한 많은 학생을 넓게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교사는 소외되지 않도록 최대한 많은 학생의 이름을 불러주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교사와 눈이 맞춰지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충분히 배움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배움의 소외를 없애기 위해서 협동 학습은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협동 학습은 단시간 내에 최대한 빨리 수업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수업은 학생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예술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수업 속에서 나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수업하는 것이 힘들고 그것은 학생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족하는 수업이 무엇이냐’를 질문하면서 나다움을 찾아가야 합니다.
교사는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해서 ‘교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은 누구인가’, ‘내가 가르치는 교과 지식은 무엇인가’, ‘학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왜 교사가 되었는가’ 등 기본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교사인 나의 모습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런 치열한 내면적 탐색 없이는 수업 속에서 나다움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저 좋은 직업으로서의 교사에만 만족하고서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색을 게을리한다면, 나의 수업은 아무런 배움도, 빛깔도 없는 수업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자기 표현을 이제는 수업에서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교사를 하려고 하는가’, ‘나는 교사로서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내게 학생은 누구인가’ 등의 철학적 질문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사로서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수업 속에서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수업 속의 나’와 ‘자연인으로서의 나’가 분리되지 않아 내가 만족하는 수업을 할 수 있다.
결국 수업이라는 것은 삶을 말하는 것인데, 삶을 즐기고 사색하고 묵상할 수 없으니 수업을 잘하지 못했던 거군요. 교사 개인이 예술을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할 때 수업도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 한국초등수석교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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