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
하루에 45분 정도한다.
1)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2) 성경을 읽는가?
게임과 성경읽기를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성경을 읽으면 게임도 올바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표현된 것이다.
과연 그런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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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예배하는 그것을 닮아간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은
의무를 넘어 우리의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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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사람

1. 사람으로 부모님에게서 태어난다. 기원을 따지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섭리하에 정하시고 보내주신 것이다. 낯선 아이, 그러나 그 기원과 근본은 결코 어리지 않다. 아담과 하와에게로 까지 그 DNA가 연결된다. 그동안의 인류의 역사 전부는 아니지만, 그 혈통이 겪어온 역사의 굴절이 배어있고 진화(?)해온 점이 있다.
그러니 아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아이라고 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 씨앗안에 숨겨진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떤 토양을 만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발현을 보게 될 수 있다.

2. 사람으로 자라간다.
배태된 씨앗의 DNA를 가지고 제공되는 모든 환경과 교육을 양분으로 자라간다. 뻗어가는 가지, 피어나는 잎들, 얼마나 넓어질지 어떤 색깔과 냄새를 풍길 지 어릴 때는 잘 모른다. 무슨 자양분을 가지고 어떤 자리에서 활동하는가에 따라서 사회의 큰 기둥이 되기도 하고, 재목이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장식품이 되기도 한다. 이름없는 풀로서 만인을 위한 만인의 배경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되어갈지 자기 주체적인 의식으로 방향을 잡고 땀을 흘리며 기회를 타는가에 따라서 삶이 달라진다.
누가 그것을 미리 알고 그를 깨닫게 해줄까? 그것을 미리 볼 수 있다면 동기부여를 받아 더욱더 땀을 흘렸을텐데... 후회와 아쉬움이 따르기도 한다.
알면서도 제대로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기회가 따라와 주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견제와 경쟁에 밀려서 전혀 생각지 않던 길로 갈 수도 있다.

3. 사람
결국 마지막 길로 가는 점에서는 똑같다. 누구도 이 길을 피할 수 없다. 혹시는 조금 연장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숭배하거나 멸시하거나 상관없이 그는 돌아올 수 없다.
이것을 미리 알고 온갖 꽃들과 영화들을 멀리하고 오롯이 해탈의 길을 찾아 나선 사람도 있다.

눈을 뜨고 살지만 다시 눈을 얻어야 한다. 내일을 알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좀 나은 사람들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당장 오늘 살아갈 일이 막막한 사람들에게 내일을 준비하라는 것은 면피용 아편에 불과할 수 있다. 내일도 내일 나름이다. 어떤 내일인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지기를 원하는가?
누가 알 수 있는가? 모두 자기의 길이 있을 뿐인데, 아무도 다른 사람의 길을 대신 가 줄 수는 없다.
오직 자기가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하지만 혼자서만 사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살 수도 없다.
사람이면 가야할 길이 있다. 사람으로서 가야할 길이 있다.

누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사람이 어디로 가야하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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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나무의 것인가?
씨앗, 흙, 물, 빛, 공기
모두 받은 것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위로 가지 뻗어
하늘 향해 바람타고
찬양한다.
창조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
완성주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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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해적을 주구장창 노래하고 해적선을 가지고 놀고, 온갖 해적선을 (비록 장난감이긴 하지만) 수집하여 콜렉션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4세, 남자 아이입니다.
해적과 해적선을 너무 좋아해서 시간이 되면 해적선을 그려달라하고 해적 관련 책들을 글씨도 아직 다 익히지 않았지만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보고 또 봅니다.

과연 이 아이는 어떤 사람으로 자라갈까요?
참고로 2살때는 일년 넘게 아기상어, 상어가족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상어를 잊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 손에 딱 잡히는 해적선을 선물받았는데 배의 앞부분이 상어 모양이라 더욱 더 좋아합니다.
몇번을 상어 모양이 앞에 있는 그 해적선을 꼭 가져다 달라 확인하고 또 확인하더니 마침내 자기 손에 들어온 날 하루 종일 손에서 내려놓지를 않습니다.

해적이 뭐가 그리 좋을까요?

피터 팬을 아시나요?
피터 팬(Peter Pan)은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J. M. 배리가 만든 소설 속의 인물이다. 피터 팬은 하늘을 날며, 자라기를 바라지 않는 장난꾸러기 소년이다. 그는 작은 섬 네버랜드에서 잃어버린 아이들이라는 단체를 이끄는 두목으로, 요정과 해적들을 상대로 하고 때때로 바깥 세상의 어린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아이는 네버랜드에 있는 듯 생각하기도 합니다.
모양과 크기가 같은 후크 선장 피규어 2개를 서로 비교하면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줄줄이 찾아 말합니다.
무슨 일이 이 아이의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요?

자기 혼자말로 이야기를 꾸며내며 해적선을 가지고 놉니다. 해적선 그림을 그려달라고 조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스스로 끄적대어 형편있는(?) 작품을 그려냅니다.

홈플러스나 이마트 같은 매장에 가면 장난감 코너에서 해적선 관련 아이템들을 찾아 자기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달라고 조르며 엄마 아빠와 흥정을 합니다. 엄마 아빠는 여러 조건들을 내어 걸고 훈육에 먹잇감으로 사용합니다. 대체로는 "말을 잘 들으면(? 말 잘듣는다는 관용어법을 모두 잘 알고 계시죠) 이것을 사줄께~"

어디 해적선 뿐이겠습니까 만은, 아이는 꼼짝없이 부모의 전략에 참여하여 수행자가 됩니다.
아이도 조건을 걸고 흥정을 하게 되죠. 점점 고도의 흥행 건들이 진행되게 됩니다.
때로는 아주 파격적으로 부모가 아이에게 은전을 베풀거나, 아이가 부모 속을 완전 뒤집어놓기도 합니다.
어디에서 균형점을 잡고 어떤 언사가 오고 가느냐가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라 아이가 모르는 뒷전에서 온갖 훈육전략을 숙의하고 토론도 하게 됩니다. 어떨 때는 소위(?) 이 분야의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조언을 청취하여 참고로 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 해적선이 만들어지고 유통될까요?
관련되는 장난감 회사와 관계자들, 방송, 도서관련자들, 유통업자들, 전사회적망과 네트워크가 작동합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 온 마을이 필요한 정도가 아니고, 전 세계의 역사와 문화와 경제, 정치, 종교, 지구촌적인 관심과 유통이 배경으로 깔려서 상호작용하고 영향을 주고 받게 됩니다.

아이의 마음 중심에서는 무엇이 움직이고 있을까요?
이제 키운다면 (44) / 최대규

어릴 때는 모든 것이 크게 보였습니다. 내가 작으니, 나의 밖에 있는 것은 모두 크게 보였습니다. 나는 마포구 성미산 앞 서교동 밭 동네에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냈고, 초등학교 때와 중, 고등학교는 망원동 본토라는 57번지에서 살았습니다. 서교동과 망원동 일대를 가끔 들러봅니다. 이제는 엄청 도시화 되어서 옛날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마을 길은 없어지지 않고 그 틀을 유지한 체로 새로운 집들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서 옛날을 추억할 수는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아직도 50년 넘는 옛 모습을 간직한 한 두 곳의 집들이 회상의 도화선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좁은 골목, 작은 터 위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가 커져서 그런가? 절대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데, 좁아보이고, 작게 보입니다.

이런 것은 단지 공간적인 건물이나 골목만이 아닙니다. 어릴 때 공부할 때 그렇게 높이 보이고 대단해 보이던 직업이나 직위들이 그 실상을 알게 되니 참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약사, 교사, 교수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힘든 일들, 번거로운 일들을 하는 직업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과장, 청장, 총장, 장관, 대통령, 국회의원, 법관 ... 이들의 명예나 자리는 참으로 고단하고 괴로운 일들을 맡아서 죽도록 고생해야 하는 처지들입니다.
회사 사장, 재벌 회장, 갑부 들...
그들 역시 얼마나 머리를 싸매고 회사를 경영하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이익을 남기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야 하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서 사회 공동체의 유기적 연합과 기능을 생각하면 그들이 얼마나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로 섬기는 자리인지를 제대로 평가하고 역시 존경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같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 드려서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모든 섬김의 직분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해롭게 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일삼는 자리에 머무르는 경우가 너무 많기에 참으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어가고, 삶과 세상의 실체를 알아갈수록 그것들이 얼마나 순간적인 일들에 불과한 가를 깨닫습니다. 그렇게 죽자사자고 매달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서 실력을 쌓아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섬기는 일은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한 일입니다. 사실 그것을 위해서 그 자리와 직분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좋고 훌륭한 자리와 직분도 시간이 가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느 직업이 가장 좋은 직업인가요? 어느 직위가 가장 좋은 직위인가요?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잠정적인 결론으로는 어느 직업이든지(물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직업이어야겠지요), 어느 직위이든지(물론 높은 직위로 갈수록 책임과 권한이 커지니까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만큼 힘이 들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와 힘을 다해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가장 좋겠습니다.
저는 환경미화원에 대해서 자주 생각합니다. 저의 직업이 환경미화원은 아니지만 그들의 일과 지위가 얼마나 이 사회에 중요한가를 되새기며 그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과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씁니다. 나도 이 지구의 한 작은 환경미화원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분들이 헛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미력이라도 도우려는 마음도 있고요.

대통령이 존경스럽지만, 어릴 때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그 직업과 자리가 얼마나 중차대하고 힘든 지를 알게 되고서는 존경은 하지만 그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른 여러 직업들과 직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저의 환경과 실력에 맞게 그런 중요한 포스트에 오르게 된다면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 직무를 감당하는 일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나의 삶의 최종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명예, 돈, 인기, 권력... 그 어떤 것도 나의 삶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잠깐 지나가고 나면 흔적없이 사라질 것들이지요. 바람이나 안개처럼 사라질 것들입니다.

저는 조금 더 나아가서 이 온 세상의 만물과 우주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가를 생각합니다. 도저히 생각의 세계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규모와 차원이 있습니다. 정말 놀랍고 놀랍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한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 한 점도 아니고 훅 불면 사라질 먼지 같은 것들입니다. 나 자신의 존재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넓고 광활한 우주와 다양한 생명체들도 다 한줌에 불과합니다. 그 자체를 신처럼 여기고 그 안에서 영생불사를 도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영생불사를 추구해보시죠. 무엇이 나옵니까?

어릴 때 그렇게 크고 높게 보이던 것들이 한낫 한점 먼지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을 뿐입니다.

자녀교육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왜 자녀들을 가르치고 자라게 해야합니까? 높은 자리와 많은 재물과 인기와 명예와 권력을 차지하게 하려고 합니까?
다 지나가는 것이지요. 돌아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요?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요?
바람에 불려 사라지지 않고 한 인격으로 존재하고 느끼고 생명을 누리는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요? 어떻게 교육이 되어야 하는지요?

전도서 12장 13~14절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잠언 3장 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마태복음 11장 28~30절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런 말씀들이 그냥 듣기 좋은 덕담이 아니라, 진리인 것을 가르치는 자녀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언어로 유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생명을 얻고 생명을 발휘하여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 곧 물질의 에너지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생명되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영의 에너지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키울 수 있을까요? 성경을 줄줄 외우게 하면 될까요?
이제 키운다면 (43) / 최대규

당신은 흩어지심이 없이 우리를 하나로 모으십니다(어거스틴, 고백록, 1권, 3,3)

오, 주님, 내 마음의 귀가 당신의 면전에 있사오니 내 귀를 열어 주소서. "나는 네 구원이라"고 내 영혼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거스틴, 고백록, 1권 5,5)
이제 키운다면(42) / 최대규

내 자신에 의한 분열
내적인 싸움(씨름)
그 싸움의 원인은 내 안의 죄

어거스틴의 고백록 제1권 첫부분에 그의 고백록의 전체 사상을 나타내는 유명한 문장이 나옵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의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기는 것입니다."
의 답과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의 언술보다 어거스틴은 그 본질을 더 꿰뚫어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동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중심을 움직이시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아닌 어떤 것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 속의 죄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사람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고 저항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전에는 그 죄아래 내(사람)가 갇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무능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우상 숭배 곧 자기 자신을 높이고 찬양하는 일에 매여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다 드려서 자기를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죄인인 나에게 덮입혀주심으로 죄인인 내가 나에 대해서는 이제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게 하여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희생에 터하여 베푸신 은혜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7~18절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2문에서 마지막 107문 까지는 바로 어거스틴의 이 고백을 이루는 일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사람이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죄와 칭의와 영화롭게 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말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찬양과 즐김의 여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지난한 씨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자기 분열이 있습니다. 내적인 씨름이 있습니다. 새사람과 옛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내적 씨름입니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그리하여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다면 그런 씨름과 분열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수고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생에게 저주하심을 스스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인생의 수고와 씨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하는 내적인 씨름은 질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씨름이고 분열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할 것인가?의 씨름과 분열입니다.

골로새서 3장 9~10절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안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안식일, 곧 주일 새벽입니다. 처음 창조의 안식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창조의 안식일, 곧 부활의 새벽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을 폐하고 생명과 부활의 성신의 법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살고, 하나님 안에서 쉬는 안식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날 동안은 이 안식일의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6일 동안 땀 흘려 힘써 일하고 제7일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기는 일에 집중하는 안식을 누립니다. 그리고 이 땅의 생을 마치고 주님께서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날, 영원한 안식,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기는 일로만 가득찬 안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 본향 집을 향해서 걸어가는 순례의 나그네길이 지금 현재의 삶입니다.
만물의 상속자이고 주인의 아들이지만 나그네로서 씨름하고 싸움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얻게되는 것들이 아무리 좋고 좋아도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안식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힘든 어려움과 고난을 통과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긴 터널을 통과하면 밝은 빛으로 빛나는 곳에 이르듯이 아버지의 품에서 안식할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교육은 참된 소망, 곧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자기를 실현하도록 돕는 정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생의 본분을 실현하는 안식을 목표로 하는 긴 안목의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높은 안목의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기는 사람이 되도록 키우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우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를 통하여 흐르는 기독교의 주류의 신앙과 신학을 이어받고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교육입니다.
이제 키운다면(42) / 최대규

내 자신에 의한 분열
내적인 싸움(씨름)
그 싸움의 원인은 내 안의 죄

어거스틴의 고백록 제1권 첫부분에 그의 고백록의 전체 사상을 나타내는 유명한 문장이 나옵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의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기는 것입니다."
의 답과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의 언술보다 어거스틴은 그 본질을 더 꿰뚫어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동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중심을 움직이시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아닌 어떤 것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 속의 죄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사람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고 저항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전에는 그 죄아래 내(사람)가 갇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무능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우상 숭배 곧 자기 자신을 높이고 찬양하는 일에 매여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다 드려서 자기를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죄인인 나에게 덮입혀주심으로 죄인인 내가 나에 대해서는 이제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게 하여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희생에 터하여 베푸신 은혜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7~18절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2문에서 마지막 107문 까지는 바로 어거스틴의 이 고백을 이루는 일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사람이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죄와 칭의와 영화롭게 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말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찬양과 즐김의 여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지난한 씨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자기 분열이 있습니다. 내적인 씨름이 있습니다. 새사람과 옛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내적 씨름입니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그리하여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다면 그런 씨름과 분열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수고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생에게 저주하심을 스스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인생의 수고와 씨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하는 내적인 씨름은 질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씨름이고 분열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할 것인가?의 씨름과 분열입니다.

골로새서 3장 9~10절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안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안식일, 곧 주일 새벽입니다. 처음 창조의 안식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창조의 안식일, 곧 부활의 새벽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을 폐하고 생명과 부활의 성신의 법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살고, 하나님 안에서 쉬는 안식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날 동안은 이 안식일의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6일 동안 땀 흘려 힘써 일하고 제7일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기는 일에 집중하는 안식을 누립니다. 그리고 이 땅의 생을 마치고 주님께서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날, 영원한 안식,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기는 일로만 가득찬 안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 본향 집을 향해서 걸어가는 순례의 나그네길이 지금 현재의 삶입니다.
만물의 상속자이고 주인의 아들이지만 나그네로서 씨름하고 싸움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얻게되는 것들이 아무리 좋고 좋아도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안식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힘든 어려움과 고난을 통과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긴 터널을 통과하면 밝은 빛으로 빛나는 곳에 이르듯이 아버지의 품에서 안식할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교육은 참된 소망, 곧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자기를 실현하도록 돕는 정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생의 본분을 실현하는 안식을 목표로 하는 긴 안목의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높은 안목의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기는 사람이 되도록 키우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우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를 통하여 흐르는 기독교의 주류의 신앙과 신학을 이어받고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교육입니다.
이제 키운다면 (41) / 최대규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어떻게

재미
내적 호기심
관계

파이썬, 어거스틴,
성경의 그리스도
나와의 관계,
재미, 흥미, 내적 호기심, 연결시냅스망,
나를 구성하는 관계망의 확장,
깨달음은 내적 관계망의 초월
내외의 관계망에 대한 이해
나를 이해함
이해함의 주체로서의 반성적 자각
메타 인지,
존재와 사유의 뿌리와 배경, 맥락, 지향에 대한 시냅스적 이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성경으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고 나,
이 세상 만물,
부모님, 환경, 이웃,
공동체,
머리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즐김
하나님과 사귐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
생명의 사귐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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