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키운다면 (40) / 최대규
보여지는 게 달라
보이는게 달라
볼 수 있는 것
보는 것
시간의 변화
시간 속에서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공간의 변화
높이에 따라
하늘에서 보면
지식에 따라
아는 만큼 보여
안보이는 건 누구 책임
초월하여
매주 토요일 산행을 한다.
멀리까지는 못가지만, 집 앞에 마주 보이는 관악산 632m 높이의 너른 정원을 나의 소유로 삼아 마음껏 돌아본다.
토요일 산행에 동행자는 나의 아내, 나의 반쪽이다. 때로는 아이들도 함께 하기도 하지만 그건 가물에 콩난듯한 일이다.
우리의 안식처 작은 평수의 아파트가 위치한 곳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동네, 남향의 관악산 까치산 자락이다. 처음에는 까치산 산길을 따라 간단한 산보 정도로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의 행림초등학교 앞에 생태육교가 생기고, 이어서 남부순환도로 위로 사당동 생태육교가 놓이면서 관악산으로의 본격적인 산행이 자유롭게 되었다.
아침에 집안 일을 정리하고 생수와 간식거리를 챙기고 가볍게 산행을 한다.
산행 초기에는 산행이라기보다는 산보였다. 사당동 생태육교를 지나 전망대가 있는 남현동 바위산으로 오르는 초입에 까지 가서 잠깐 머무르다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관악산으로 오르는 산의 입구와 같은 곳이다. 몇 번을 그리하다가, 부부가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하여, 계단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이제는 제2고비라고 부르는 그 길을 올라가다가 꺾여지는 오른편으로 큰 소나무 밑에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주변의 돌들을 모아서 가지런하게 정돈해 놓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산 아래 마을과 서울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전망이 좋았다.
막힌 것 없이 펼쳐지는 전망 소위 view라고 요즘에 말하는 그 뷰~가 멋졌다.
그런데 몇 번을 그렇게 그곳까지 오르다가 좀더 올라가자고 부부가 의기투합하였다.
이제 조금 힘이 들더라고 더 올라가자고 마음을 먹고 제2고비를 지나 제3고비인 돌계단을 힘을 내서 올랐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4고비 계단을 땀흘려 오르면 제2고비 쉼터에서 보았던 전망과는 차원이 다른 더 너른 뷰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남현동 바위산의 전망대까지 험한 돌들을 타고 전망대 끝자락 부분에 설친된 철계단을 가파르게 오르면서 계속 펼쳐지는 뷰는 어느 유명한 명승지에도 비교할 수 없는 멋진 장면을 계속 보게 되는 코스다.
처음에 철계단 오르는 것이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무서웠다.
하지만 전망대에 올라 서울시 전경을 내려다 보는 그 맛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성남분당 일부부터 강남, 롯데타워, 한강의 여러 다리들, 남산타워, 북한산, 삼각산, 인수봉, 불암산, 서울 도심의 북악산, 인왕산, 안산, 여의도, 월드컵 공원, 서해로 이어지는 한강 하류의 긴 물길, 김포, 강화도, 인천, 관악산 연주대 에 이르는 넓은 전망은 가슴을 펑 뚫어지게 만드는 산소가 된다.
한동안은 이 전망대까지 오르는 것이 힘이 많이 드는 코스였다. 그러나 점점 익숙해질 수도록 체력도 강화되고 근력이 생기면서 좀더 수월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집은 비록 작은 평수이지만, 우리의 정원은 세계 어느 갑부에 못지 않게 넓고 멋지고 값비싼 자산이다.
산행이 익숙해질수록 관악산의 꽃들, 새들, 그리고 나무들을 즐기게 되었다. 봄철의 진달래 와 철쭉, 여름의 돌양지꽃, 가을의 고들빼기, 며느리밥풀꽃, 산부추, 산에 오를 때마다 쉬엄쉬엄 발견하고 친숙해지는 여러 종류의 꽃과 식물들, 새들이 더 가까워진다.
이제 전망대를 지나서 좀더 연주대쪽으로 진행을 한다. 1시간의 산행이 3시간의 산행으로, 이어 5시간의 산행으로 점점 늘어간다. 제1헬기장, 국기봉을 지나, 하마바위, 마당바위, 해태상, 제2헬기장을 지나 제2전망대까지 욕심을 내어본다. 이런 날은 중간에 점심을 먹고 30분 정도의 낮잠도 산에서 잔다. 꿀같은 잠이다. 신선놀음이다.
산행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전망이 달라진다. 남현동 전망대의 뷰가 끝내주었는데, 제2전망대까지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서울시내와 경기도 지역들을 훤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북한의 개성지역, 강화도, 인천 서해바다 지역, 안양, 청계산을 넘어서 관악산이 높이 솟은 만큼 사주를 훤히 바라본다.
제2전망대로부터 가장 힘든 코스 중 하나인 헐떡고개를 넘엇 산 꼭대기에 큰돌이 얹쳐진 좁은 관악문을 지나면, 바로 코 앞에 연주대가 놓인다.
거리로는 몇 백미터가 되겠지만, 가장 난코스 중에 난코스가 된다. 이제는 중요한 난코스에 계단이 놓여있어서 어린이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연주대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돌들로 이루어진 악산의 위험 요소들은 방심을 금하게 한다. 고소공포증을 가진 아내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더 담대해지기 시작한 아내는 무서워하는 가운데서도 연주대 정상까지 오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집에서 연주대까지의 풀코스 산행은 8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육십대의 걸음걸이와 쉼이 가져오는 결과이다.
생각해본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람이 아는 것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사람의 인식의 차원과 삶의 깊이 등.
아내는 이런 말을 했다.
"보여지는 게 달라요"
그랬다. 보여지는 게 다르다.
사람이 자기 방 속에 있을 때는 그 방 속에 있는 것만 보여진다. 조금 집을 나서서 작은 언덕에 오르면 그 만큼의 광경이 보여지게 된다. 점점 더 높은 산에 오를수록 보여지는 게 달라진다.
이렇게 보여지는 게 달라질 때, 사람은 보는 게 달라진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시력의 한계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보여지는 게 달라지면 보는 게 달라진다.
점점 더 높은 전망을 가지게 된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전체에 대한 조망을 갖게 된다.
아, 왜 그렇게 답답했던지 알 수 없었던 그 답답함이 높이 오르면 뚫리게 된다. 그랬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구나, 이렇게 넓고 멋있었구나.
하지만 이렇게 보여지는 게 달라져도, 그 사람이 마음문을 닫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면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답답함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마음 눈을 자꾸 열고 넓혀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땅 아래를 내려다 보았을 때의 그 감격을 잊을 수 없다. 한편의 시가 읊어졌다.
이게 세상이다.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살고 있다. 우주인이 되어 지구 밖으로 나가 지구를 본 사람의 말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에 품은 생각에 따라 보여지는 게 다르게 보였다.
지구 자체도 태양계를 넘어서 보는 태양계인에게는 한 점의 먼지 처럼 보일 것이다. 아니 전혀 안 보일 수도 있다. 태양만 겨우 한 점으로 보인다면 지구야 어디 흔적으로라도 보이겠는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실존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중심성 속에 머물러 모든 보여지는 것들에 대해 눈을 감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어리석은 자이다.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자기 주체적으로 실존하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내가 이런 것들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판단해 줄 수 없다. 조언은 해 줄 수 있을 지 모르나, 결국 각자가 인격적으로 판단하고 자기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모든 거대한 정원을 자기 것으로 즐기며 그 안에서 기쁨으로 노래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비탄에 잠겨, 삶의 허무를 노래하고, 왜 내가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뭉게 버릴 것인가?
이렇게 공간적으로 높이를 따라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인식과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비슷하게 시간에 대해서 또다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는 일은 참 감당하기 쉽지 않은 과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시간의 유한함을 넘어 영원에 이르기까지, 초월적 사유의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고 사유에 대해서 또 반성적 사유를 하는 과정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살펴보고, 사유의 뿌리를 찾아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실존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이고 지금도 부지런히 그 일을 하는 거다. 여기에 한 인격의 존엄함이 있고 자기 주체성의 근거가 있다. 먼지 같은 존재라도 아무 것도 없는 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바람처럼, 어둠을 뚫고 비추이는 빛처럼 그렇게 에너지로 존재로 열매맺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뿌려진 씨들이 심겨지고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맺듯이 그렇게 죽을 것으로 심어지고 썩어질 것으로 심어지지만 죽음을 이겨내고 썩질 않을 것으로 영원히 살 영광스러운 존재로 열매맺혀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처럼 현상적 죽음을 이겨낸 부활의 믿음으로 자녀교육이 행해져야 한다. 죽음의 탑에 갇혀서 보여지는 것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부활의 믿음으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 하늘과 영원의 차원에서 전망을 가지고 그 아름다운 뷰로 자녀들을 교육해야 한다. 이 뷰를 함께 즐기고 나누어야 한다.
보여지는 게 달라
보이는게 달라
볼 수 있는 것
보는 것
시간의 변화
시간 속에서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공간의 변화
높이에 따라
하늘에서 보면
지식에 따라
아는 만큼 보여
안보이는 건 누구 책임
초월하여
매주 토요일 산행을 한다.
멀리까지는 못가지만, 집 앞에 마주 보이는 관악산 632m 높이의 너른 정원을 나의 소유로 삼아 마음껏 돌아본다.
토요일 산행에 동행자는 나의 아내, 나의 반쪽이다. 때로는 아이들도 함께 하기도 하지만 그건 가물에 콩난듯한 일이다.
우리의 안식처 작은 평수의 아파트가 위치한 곳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동네, 남향의 관악산 까치산 자락이다. 처음에는 까치산 산길을 따라 간단한 산보 정도로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의 행림초등학교 앞에 생태육교가 생기고, 이어서 남부순환도로 위로 사당동 생태육교가 놓이면서 관악산으로의 본격적인 산행이 자유롭게 되었다.
아침에 집안 일을 정리하고 생수와 간식거리를 챙기고 가볍게 산행을 한다.
산행 초기에는 산행이라기보다는 산보였다. 사당동 생태육교를 지나 전망대가 있는 남현동 바위산으로 오르는 초입에 까지 가서 잠깐 머무르다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관악산으로 오르는 산의 입구와 같은 곳이다. 몇 번을 그리하다가, 부부가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하여, 계단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이제는 제2고비라고 부르는 그 길을 올라가다가 꺾여지는 오른편으로 큰 소나무 밑에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주변의 돌들을 모아서 가지런하게 정돈해 놓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산 아래 마을과 서울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전망이 좋았다.
막힌 것 없이 펼쳐지는 전망 소위 view라고 요즘에 말하는 그 뷰~가 멋졌다.
그런데 몇 번을 그렇게 그곳까지 오르다가 좀더 올라가자고 부부가 의기투합하였다.
이제 조금 힘이 들더라고 더 올라가자고 마음을 먹고 제2고비를 지나 제3고비인 돌계단을 힘을 내서 올랐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4고비 계단을 땀흘려 오르면 제2고비 쉼터에서 보았던 전망과는 차원이 다른 더 너른 뷰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남현동 바위산의 전망대까지 험한 돌들을 타고 전망대 끝자락 부분에 설친된 철계단을 가파르게 오르면서 계속 펼쳐지는 뷰는 어느 유명한 명승지에도 비교할 수 없는 멋진 장면을 계속 보게 되는 코스다.
처음에 철계단 오르는 것이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무서웠다.
하지만 전망대에 올라 서울시 전경을 내려다 보는 그 맛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성남분당 일부부터 강남, 롯데타워, 한강의 여러 다리들, 남산타워, 북한산, 삼각산, 인수봉, 불암산, 서울 도심의 북악산, 인왕산, 안산, 여의도, 월드컵 공원, 서해로 이어지는 한강 하류의 긴 물길, 김포, 강화도, 인천, 관악산 연주대 에 이르는 넓은 전망은 가슴을 펑 뚫어지게 만드는 산소가 된다.
한동안은 이 전망대까지 오르는 것이 힘이 많이 드는 코스였다. 그러나 점점 익숙해질 수도록 체력도 강화되고 근력이 생기면서 좀더 수월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집은 비록 작은 평수이지만, 우리의 정원은 세계 어느 갑부에 못지 않게 넓고 멋지고 값비싼 자산이다.
산행이 익숙해질수록 관악산의 꽃들, 새들, 그리고 나무들을 즐기게 되었다. 봄철의 진달래 와 철쭉, 여름의 돌양지꽃, 가을의 고들빼기, 며느리밥풀꽃, 산부추, 산에 오를 때마다 쉬엄쉬엄 발견하고 친숙해지는 여러 종류의 꽃과 식물들, 새들이 더 가까워진다.
이제 전망대를 지나서 좀더 연주대쪽으로 진행을 한다. 1시간의 산행이 3시간의 산행으로, 이어 5시간의 산행으로 점점 늘어간다. 제1헬기장, 국기봉을 지나, 하마바위, 마당바위, 해태상, 제2헬기장을 지나 제2전망대까지 욕심을 내어본다. 이런 날은 중간에 점심을 먹고 30분 정도의 낮잠도 산에서 잔다. 꿀같은 잠이다. 신선놀음이다.
산행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전망이 달라진다. 남현동 전망대의 뷰가 끝내주었는데, 제2전망대까지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서울시내와 경기도 지역들을 훤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북한의 개성지역, 강화도, 인천 서해바다 지역, 안양, 청계산을 넘어서 관악산이 높이 솟은 만큼 사주를 훤히 바라본다.
제2전망대로부터 가장 힘든 코스 중 하나인 헐떡고개를 넘엇 산 꼭대기에 큰돌이 얹쳐진 좁은 관악문을 지나면, 바로 코 앞에 연주대가 놓인다.
거리로는 몇 백미터가 되겠지만, 가장 난코스 중에 난코스가 된다. 이제는 중요한 난코스에 계단이 놓여있어서 어린이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연주대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돌들로 이루어진 악산의 위험 요소들은 방심을 금하게 한다. 고소공포증을 가진 아내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더 담대해지기 시작한 아내는 무서워하는 가운데서도 연주대 정상까지 오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집에서 연주대까지의 풀코스 산행은 8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육십대의 걸음걸이와 쉼이 가져오는 결과이다.
생각해본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람이 아는 것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사람의 인식의 차원과 삶의 깊이 등.
아내는 이런 말을 했다.
"보여지는 게 달라요"
그랬다. 보여지는 게 다르다.
사람이 자기 방 속에 있을 때는 그 방 속에 있는 것만 보여진다. 조금 집을 나서서 작은 언덕에 오르면 그 만큼의 광경이 보여지게 된다. 점점 더 높은 산에 오를수록 보여지는 게 달라진다.
이렇게 보여지는 게 달라질 때, 사람은 보는 게 달라진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시력의 한계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보여지는 게 달라지면 보는 게 달라진다.
점점 더 높은 전망을 가지게 된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전체에 대한 조망을 갖게 된다.
아, 왜 그렇게 답답했던지 알 수 없었던 그 답답함이 높이 오르면 뚫리게 된다. 그랬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구나, 이렇게 넓고 멋있었구나.
하지만 이렇게 보여지는 게 달라져도, 그 사람이 마음문을 닫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면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답답함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마음 눈을 자꾸 열고 넓혀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땅 아래를 내려다 보았을 때의 그 감격을 잊을 수 없다. 한편의 시가 읊어졌다.
이게 세상이다.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살고 있다. 우주인이 되어 지구 밖으로 나가 지구를 본 사람의 말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에 품은 생각에 따라 보여지는 게 다르게 보였다.
지구 자체도 태양계를 넘어서 보는 태양계인에게는 한 점의 먼지 처럼 보일 것이다. 아니 전혀 안 보일 수도 있다. 태양만 겨우 한 점으로 보인다면 지구야 어디 흔적으로라도 보이겠는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실존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중심성 속에 머물러 모든 보여지는 것들에 대해 눈을 감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어리석은 자이다.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자기 주체적으로 실존하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내가 이런 것들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판단해 줄 수 없다. 조언은 해 줄 수 있을 지 모르나, 결국 각자가 인격적으로 판단하고 자기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모든 거대한 정원을 자기 것으로 즐기며 그 안에서 기쁨으로 노래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비탄에 잠겨, 삶의 허무를 노래하고, 왜 내가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뭉게 버릴 것인가?
이렇게 공간적으로 높이를 따라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인식과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비슷하게 시간에 대해서 또다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는 일은 참 감당하기 쉽지 않은 과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시간의 유한함을 넘어 영원에 이르기까지, 초월적 사유의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고 사유에 대해서 또 반성적 사유를 하는 과정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살펴보고, 사유의 뿌리를 찾아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실존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이고 지금도 부지런히 그 일을 하는 거다. 여기에 한 인격의 존엄함이 있고 자기 주체성의 근거가 있다. 먼지 같은 존재라도 아무 것도 없는 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바람처럼, 어둠을 뚫고 비추이는 빛처럼 그렇게 에너지로 존재로 열매맺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뿌려진 씨들이 심겨지고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맺듯이 그렇게 죽을 것으로 심어지고 썩어질 것으로 심어지지만 죽음을 이겨내고 썩질 않을 것으로 영원히 살 영광스러운 존재로 열매맺혀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처럼 현상적 죽음을 이겨낸 부활의 믿음으로 자녀교육이 행해져야 한다. 죽음의 탑에 갇혀서 보여지는 것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부활의 믿음으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 하늘과 영원의 차원에서 전망을 가지고 그 아름다운 뷰로 자녀들을 교육해야 한다. 이 뷰를 함께 즐기고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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