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추천] 부모님과 함께 읽는 예수님 이야기 (김홍전 지음, 성약출판사, 2003년)

기쁜 성탄을 앞두고 각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교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모두 예수님을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강설인 만큼
예수님의 생애 초기의 일들을 짧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어른이라도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이 있을 만큼 충실하고 깊다."

개혁신앙에 기초한 학교교육을 위해

저는 총신대 신학과를 1985년에 졸업하고, 1988년에 서울교육대학에 신입생으로 다시 입학하여 교육에 대해 배우고 1992년부터 서울시의 초등학교에 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특별히 기독교교육이라는 것을 의식하거나 부모님들과 교회에서 기독교교육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기독교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신앙교육을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였습니다.
물론 총신을 다니면서 개혁교회들에서 기독교학교를 세우고  자녀를 가정과 교회에서만 신앙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교육을 통해서도 기독교교육을 하고 있는 점들을 알게 되기는 하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일어나고 특별히 기독교교육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개혁신앙에 기초한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것을 위해서 공부에 공부, 실천에 실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립학교 교사로서의 책임도 중요함으로 학교에서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교육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육으로 일반의 학생들을 섬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개혁신앙에 기초한 기독교학교를 세우고 우리 아이들이 가정과 교회와 학교에서 삼위일체적으로 기독교교육을 받고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때는 잘 갖추어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작하지 못했고, 함께 할 수 있는 분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러면 어느 정도 갖추어졌는지 냉정하게 생각하면 역시 부족하기만 합니다. 
자, 그럼 언제나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다음 세대가 다시 맨땅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입장이 되도록 내어버려두어야 할까요? 주께서 허락하신 경험과 지혜와 아이디어를 언제까지 미루고 또 미루어야할까요? 
그러나 주변에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에 기초한 바른 교육을 하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분들이 계시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와 노력, 땀흘림이 결코 무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19세기, 20세기 초에 기독교 국가였던 네덜란드에서 조차도 기독교학교를 세우고 자리를 잡게 하는 데에 거의 백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그들은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고,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주의 인도를 구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귀중한 것을 귀중하다고 보여주어야 다음 세대가 그것을 인정하고 주께서 은혜 베풀어 주심으로 그 길로 점점 더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히 주만 바라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21대 국회~ 민주의 구현 / 최대규

민주주의의 기본도 국민들의 수준에 따라 다릅니다.
이젠 성숙한 민주시민들의 요구대로 가야합니다.
과거 민주도가 낮았던 시대의 관행 을 따라 발목잡기만 하고 결국 자기들 소수의 가진 자들 집단 이익을 위해서 대다수 국민들은 안중에 없었던 실권없는 야당에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민주를 따라 수준을 높여 책임지는 여당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여당이 책임있게 주재하는 상임위원장(무슨 특권이 아닌 회의의 사회자이고 중재자인 자리입니다)을 맡아서 제대로 된 입법을 해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당이 하는 일들이 국민 대다수의 뜻에 반한다면 성숙한 국민이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야당은 생산적인 비판세력으로 건전한 대안을 마련하여 국민을 설득시키기 위해
정정당당하고 민주적으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렇다면 국민이 다음 선거에서 판단할 겁니다.

이 싯점은 건전한 야당의 역할을 재정립하여 민주도에 맞고 국민의 수준에 맞게 정치가 시행되어야할 때입니다. 그리고 여당은 더욱 더 진실되게 책임정치를 하여야 합니다. 소수의 여론 주도층이 아닌 다수 국민을 위해 섬기는 종으로서 공적인 책임을 성실하게 행하는 발전의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북한과 일본 사이에서 / 최대규

6월 6일 현충일 사이렌이 오전10시에 1분간 길게 대한민국 온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사이렌이 울릴 때 처음에는 비행기 공습 사이렌인가? 순간적으로 착각을 했다. 무의식 속에 담겨있는 북한에 대한 여전한 공포와 트라우마를 숨길 수 없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70년이 지났다. 북한을 역사상 그리고 현시점에서 지상최대의 적으로 여기고 멸공통일을 외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본 ~ 임진왜란 7년의 전쟁과 일제강점 35년을 생각하니 침략자 일본은 속된 말로 씹어먹어도 속이 풀리지 않을 철천지 원수다. 그들로 인해 당한 아픔을 결코 우리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북한에 대해 적개심을 품는 이들이 일본에 대해 아량을 베푸는 것을 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대해 화해와 협력을 이야기 하는 이상으로 북한에 대해 과거에 얽매이기 보다 현재와 미래를 위해 서로 포용적이고 신사적으로 엄중한 국가대 국가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신중하게 상대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도 북한도 결국 실용적으로 대하고 대한민국의 국익을 최대화해야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해 감정적 대응을 넘어 실리적 접근이 요구된다. 정서적으로 한맺힌 것이 많아도 일본 보다는 덜하지 않은가? 트라우마를 벗고 고래등싸움 같은 국제적 대립과 갈등 속에서 좀더 유연하게 독립된 국가로서 자존심을 가지고 똑같이 상대를 인정하고 우리 모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본보다는 좀더 애정을 가지고 북한을 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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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꼭 필요한 것들을 이루어 가게

사용하시길 기도한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청림출판. 2011

 

The Shallows(09) 검색과 기억(3)

274쪽

<인간의 기억은 끊임없이 갱생한다>

캔델

암묵 기억은  "의식적인 노력이나 우리가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이 행동을 통해

                즉각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275쪽

기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통의 의미는

'외현기억'(explicit memory)으로, 우리 의식적 사고의 작업 기억 속으로 불러 들일 수 있는

사람, 사건, 사실, 생각, 느낌, 인상 등의 기억들이다.'

 

외현 기억은 우리가 과거에 대해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

캔델이 이 외현 기억을 두고 '복잡한 기억'이라고 언급하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외현 기억에 대한 장기적인 저장은 암묵적인 기억을 저장할 때 일어나는 '시냅스적 강화'의 생화학적

그리고 분자적 과정을 수반.

하지만 이는 또한 '시스템 강화'라고 불리는 두번째 형태의 강화를 요구하는데,

이는 뇌의 멀리 떨어진 부분 간의 조하로운 상호작용을 수반한다.

 

분명한 것은 외현 기억의 강화는 대뇌피질과 해마 사이의 길고 긴밀한 '대화'를 포함한다.

해마는 방향감각을 관장하는 부분인 동시에 외현 기억의 형성과 관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함

 

276쪽

헨리 몰라이슨(Henry Molaison)(1926- ) 1953년 내측 측두엽의 일부분과 해마의 대부분을 제거-간질에서 해방 그러나 기억에 문제

몰라이슨의 경험은 영국의 심리학자 브렌다 밀너(Brenda Milner)에 의해 상세히 기록됨

이 경험은 해마가 새로운 외현 기억의 강화에 중요한역할을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해마와 관계없이 존재함을 암시

 

밝혀진 바

특정 경험에 대한 기억은 경험을 기록하는 대뇌피질 부분에만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기억을 위해서는 청각피질이, 눈으로 본 것의 기억을 위해서는 시각피질 등) 해마에서도 저장된다는 것

해마 내 시냅스들이 매우 빨리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호 체계를 통해 해마는 며칠 동안 이 기억이 피질에서 안정되는 것을 도우며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변환시키기 시작

 

일단 기억이 완전히 강화되면 이는 해마에서 지워지는 것으로 보이며,

피질은 유일한 저장 장소가 된다.

277쪽

외현 기억을 해마로부터 피질로 완전히 이동시키는 것은 수년이 걸리는 점진적인 과정

이것이 바로 몰라이슨의 기억이 해마와 함께 사라져버린 이유이다.

 

해마는 의식적인 기억이라는 교향곡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듯하다.

피질에 특정 기억을 고정시키는데 관여하는 것을 넘어 뇌에 각각 저장되지만 결국 한 사건에 대한

단일하고 매끄러운 기억을 형성해내는 다양하고도 동시발생적인 기억(시각, 공간적, 청각, 촉각, 감정적)을

꿰어맞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와 이런 다양한 것들을 비빔밥으로 만들어서 하나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 해마가..........

그러면 해마가 도대체 뭐야..........왜 그런 게 있는 거지...........

감각과 의식 사이의 교량..................................)

 

 

신경과학자들은 이 해마가 새로운 기억과 오래된 기억 간의 연결을 도와 기억의 유연성과 깊이를 형성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기억 간의 연결은 우리가 수면 상태에서 해마가 다른 인지적 업무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형성되는 듯 하다

(야, 그렇다면 수면이 중요하네. ..........마냥 잠 안자고 하는 일들이 공부가 아니네

잠을 자는 일이 아주 중요하네......... 해마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하네..........)

 

연구결과들은 우리가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기억도 그러함을 보여준다.

 

외현 기억과 암묵 기억의 작동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져야 할 것들이 많으며,

우리가 아는 것의 대부분은 향후 연구를 통해 수정되고 개선될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증거들은 우리 머릿속 기억은 모든 단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독특한 환경과 또 우리의 독특한 경험의

형태에 맞추어 정교하게 조정되는, 매우 복잡한 자연적 과정의 산물임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지 환경과 경험의 조화, 복잡한 자연적 과정의 산물 - 기억.......)

 

278쪽

지속적이면서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유기적 성장을 강조한 기억에 대한 오래된 생물학적인 은유는 매우 적절한 것으로

판명났다.

 

사실 생물체의 기억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고 또 컴퓨터 칩들에 의해 처리되는 비트 단위의 디지털 정보에 빗대는,

세련된 첨단 기기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은유보다는 오래된 비유가 더 적합한 것 같다.

(이게 무슨 말인가? ............)

인간 기억에 대한 매우 변화무쌍한 생물학적 신호, 화학적, 전기적, 유전적 요소,

형성되고, 유지되고, 연결되고, 상기시키는 모든 요소들은 거의 무한한 단계적 차이를 갖는다.

 

컴퓨터 기억은 0과 1과 같은 단순한 이진법적 비트로 존재하며, 이는 열리거나 닫힌,

하지만 중간은 없는 고정된 회로를 통해 처리된다.

 

이스라엘 하이파대학교의 신경생물학&행동생물학과의 코비 로젠블럼(Kobi Rosenblum)학과장

-기억 강화에 대한 실험을 광범위하게 실시

-그의 연구를 통해 - 눈에 띄는 발견 중 하나 ->생물체의 기억이 컴퓨터 메모리와 어떻게 다른가?에 관한 것

"인간 뇌에서 장기 기억의 형성 과정은 컴퓨터와 같은 '인공 뇌'와는 명확히 다른 매우 믿기 힘든 과정 중 하나다.

인공적인 뇌가 정보를 빨리 빨아들이고 즉각 기억 속에 저장하는 반면 인간의 뇌는 정보를 받아들인 지 한참 후에

처리하며, 기억의 질은 정보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달려 있다"

생물체의 기억은 살아 있는 데 비해 컴퓨터의 메모리는 그렇지 않다.

 

279쪽

기억을 인터넷에 아웃소싱하는 것을 환호하는 이들은 은유를 호도하고 있다.

그들은 생물체의 기억이 지닌 근본적으로 유기적인 성격을 간과한 것

정말 기억을 풍부하게 하고 그 특징을 형성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비함과 연약함 뿐 아니라

우연성 때문이다.

몸이 변하듯이 변화하면서 시간 속에 존재한다.

기억을 되살리는 바로 그 행동은 새로운 시냅스의 말단을 만드는 단백질 형성을 포함하는 모든 강화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우리가 외현적인 장기 기억을 작업 기억으로 불러오면 이는 또다시 단기 기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이 기억을 강화할 때 새로운 연결의 조합, 즉 새로운 문맥이 생긴다.

 

"기억을 하는 뇌는 기억을 처음 형성하는 그 뇌가 아니다.

오래된 기억을 현재의 뇌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은 업데이트되어야 한다"

(조셉 르두 Joseph LeDoux)

 

생물체의 기억은 끊임없이 갱신하는 과정에 있다.

(이게 뭐가 다른가? 컴퓨터의 저장 매체도 끊임없이 갱신되는데....생물체와 기계의 차이..........)

컴퓨터에 저장된 기억은 반대로 별개의 정적인 비트의 형태를 띠고 있어 우리는 하나의 저장 드라이브에서

또 다른 드라이브로 이 비트들을 원하는 횟수만큼 이동시킬 수 있고, 이는 항상 예전과 완전히 동일한 형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기억을 아웃소싱한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이들은 작업 기억을 장기 기억과 혼돈하고 있다.

280쪽

미주리대학교의 기억 전문가 넬슨 코완 (Nelson Cowan)

"보통의 인간의 뇌가 컴퓨터와 다른 점은 인간의 뇌는 더 이상 경험을 기억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는 법이 없으며,

인간의 뇌는 꽉 찰 수 없다"

 

게다가 개인적인 기억을 계속 저장해감으로써 우리의 사고는 더욱 예리해짐을 여거 증거들이 보여준다.

 

임상심리학자 셰일라 크로웰(Sheila Crowell) [The Neurobiology of Learning(학습의 신경생물학)]

"기억이라는 행동은 뇌를 미래에 생각이나 기술을 배우기 쉽게 하는 방식으로 바꿀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장기 기억을 저장할 때 우리는 정신적인 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

기억을 확장할 때마다 지적 능력은 향상된다.

인터넷은 개인적인 기억에 편리하고 매력적인 보조물을 제공하지만

인터넷을 개인적인 기억의 대안물로 사용하면서 내부적인 강화 과정을 건너뛴다면 우리는 그 풍부함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텅 비게 하는 위험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

(이거 중요한 내용인데.......내부적인 강화 과정........ 그것을 건너뛴다............

내부적인 강화 과정이 바로 사고아닌가? 사고를 통한 기억...학습........이런 것을 건너 뛴 학습이 가능한가?

클릭교사....................클릭 학생....................)

 

1970년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의 휴대용 계산기 사용 허가

 

281쪽

계산기의 사례는 오늘날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의존도의 증가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주장을 지지하는데 사용된다.

우리를 기억이라는 업무에서 자유롭게 하면서 웹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생산적인 사고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경우를 평행하게 바라보는 데는 오류가 있다.

휴대용 계산기는 작업 기억의 부담을 완하시켜 중요한 단기 저장을 더욱 추상적인 추론데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경험이 보여주듯 계산기는 뇌가 생각을 작업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이동시키고, 이 기억들을 자식을 쌓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과 스키마로 표현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만든다.

 

웹은 이와는 다르다.

 (뭐가 다르지? 더 편리하지 않나?)

이는 고차원적 추론 능력에 쓰여야 할 자원을 다른 곳에 사용하게 할 뿐 아니라

장기 기억의 강화와 스키마의 발전을 방해하며 작업 기억에 더 많은 하중을 가한다.

강력할 뿐 아니라 매우 특화된 도구인 계산기는 기억을 보조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야말로 망각의 기술이다.

 

<인터넷이 우리를 망각에 익숙하게 만든다>

계속.......................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니콜라스 카 지음/최지향 옮김. 청림출판. 2011

 

03-2 문자, 새로운 사고의 도구

 

86쪽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edrus)]  중에서

 

소크라테스 "글쓰기의 적절함과 부적절함에 대한 의문이 남는군"

파이드로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알파벳을 비롯한 많은 발명품을 만드는 등,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집트 신 테우스와 이집트 왕인 타무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

 

테우스는 타무스에게 글쓰기의 미학에 대해 설명하고, 이집트인이 그 축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

87쪽

"글쓰기는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현명하게 만들고 기억력을 향상시킬 것"이며, 그 이유는

"문자가 기억력과 지혜를 조합하는 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타무스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개발자 자신은 개발품의 가치에 대해 신뢰할 만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가 아님을 환기시킨다.

"인간은 예술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떤 이는 예술을 창조하고 어떤 이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예술이 주는

해악과 이익을 평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만든 글쓰기에 관해서는 진실과 정반대되는

효과를 선언하고 있군요."

 

이집트인들이 글쓰기를 배운다면

"이집트인들의 영혼에 망각이라는 것이 심어질 것. 글로 쓰여진 것에 의존하고 스스로 가진 것에서

기억을 되살리지 않고 외부적인 기록을 사용함으로 인해 기억 활동을 멈출 것"

(상당히 중요한 통찰이다. 고대부터 이런 인식이 있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오히려 새로운 문자의

사용에 대해서 익숙치 못한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처음부터 그런 위험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글자를 쓰지 말자는 것은 아니어야 하겠지만.)

 

글로 쓰여진 단어는 "기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암시를 위한 재료이며, 제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껍데기일 뿐"이라고도 말했다.

(정말 그렇다. 이 문자의 편리함이 있기도 하지만 이것이 지혜를 가리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이중성....)

또 지식을 위해 읽기에 의존하는 이들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 것도 모른다"고도 말했다.

그들은 "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대한 허영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생각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지혜가 무엇인가? 그런데 지혜를 알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지혜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21세기의 문화의 모습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을

들추어 내는지 모른다.)

 

분명히 소크라테스는 타무스의 견해에 수긍하고 있다.

그는 타이드로스에게 말하기를

"단순한 사람만이 글로 쓰여진 것이  지식과 대상에 대한 기록 중 최고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글자로 적혀진 단어보다 더 나은 것은 입을 통해 나오는 "학습자의 영혼에 새겨진 지적인 말"이라고 했다.

88쪽

소크라테스는 "망각하는 옛날과 달리 기억이 가능하다"며,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잡아내는 데 따른

실용적인 이익을 인정하지만 알파벳이라는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를 부정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주장한다.

 

외부 기호가 내부의 기억력을 대체하면서 글쓰기는 우리를 피상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만들며,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지혜로 향할 수 있는 지적인 깊이를 획득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중요한 통찰이었다. 지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은 어떻게 일어나고 생명의 작용의 총화로서

작용하는지 이 신비를 아는 것은 그야말로 난해한 일이다. 지식와 언어, 생각과 언어, 문자와 말....상징과 의미

지식과 지혜...겹겹이 둘러쌓인 비밀의 정원을 순례하는 것처럼 끝이 없는 생각에 들어가게 된다.

질적 이해라는 것도 그렇다. 글자로 표현되어지는 것들, 그 문자의 논리 안에서 과연 실체를 잡아낼 수 있을까?

많은 글쓰기를 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 이것의 한계와 또 그것의 장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을 이해하고 문화를 이해하고 그 실체를 붙잡고 진리 안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교육을 바르게 할 수 있을까? ..........)

 

연설가인 소크라테스와 달리 작가였던 플라톤은 읽기가 기억을 대체하고 내면의 깊이를 잃게 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우려에 어느 정도 공감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말에 비해 글이 지니는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도 확실하다.

[파이드로스]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기원전 4세기- 우리나라는 원삼국시대 이전 부족국가 시대였지...)

알려진 [국가론 The Republic)]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 유명한 의미심장한 문단이 나온다.

즉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무리하게 '시'를 공격하게 해 자신의 완벽한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시를 문학의 일부로, 글쓰기의 한 형태로 여기지만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는 쓰기보다는 읊는 대상이자 읽기보다는 듣는 것으로서 고대 구어식 표현을 대표하는 동시에 보편적인

그리스 문화뿐 아니라 여전히 그리스 교육 제도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시와 문학은 지적인 생활에 있어 상반되는 이상을 표현한다.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플라톤의 이 말은 시에 반하는 주장이 아니었다.

(아니 그럼 뭐지?)

시인 호머뿐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이 지켜온 것이기도 한 구전의 전통에 대한, 또한 이 방식이 반영되고

권장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반대였다.

89쪽

영국학자 에릭 해블록(Eric Havelock)은 [Preface to Plato(플라톤 서설)]에서 "사고의 구어적 단계"는

플라톤의 '주적이었다"라고 적었다.

(사고의 구어적 단계와 문자적 단계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생각이 어떻게 표현되는가의 문제인가?

그로 말미암은 어떤 구조들이 작용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플라톤의 시에 대한 비판이 암시하는 바는 해블록, 옹, 그리고 여러 고전학자들이 제시한 바대로

글쓰기라는 새로운 기술과 이 기술이 독자들에게 권장한 사고방식, 즉 논리적이고 단호하며 독립적인

방식에 대한 옹호였다.

플라톤은 알파벳을 통해 문명이 얻을 수 있는 지적 혜택을 목격했는데, 이 혜택은 이미 플라톤 자신의 글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었다. 옹은 "철학적으로 논리적인 플라톤의 사고는 글쓰기가 정신 작용에 미치기 시작한

영향력 덕분에 가능했다"고 적었다.

(과연 그런가? 논리와 언어, 특히 문자 언어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의 발전, 논리적인 전개가

문자라는 기호의 도움을 얻어서 더 고도적으로 전개되는 것인가? )

 

[파이드로스]와 [국가론]에 나타난 글쓰기의 가치에 대한 미묘하게 상반되는 시각을 통해

우리는 말하기에서 쓰기 문화로의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식한 결과이며, 도구, 즉 알파벳의 발명에서

기인한 변화였다.

또한 이 도구가 우리의 언어와 사고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이다.

 

완전한 구어 문화에서 사고는 인간 기억력의 지배를 받는다.

지식은 기억해내야 하는 무엇이며, 기억해내는 대상은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생각이지...물론) 내에서 가능하다.

인간이 문자 없이 살았던 수천 년 동안 언어는 개인의 기억 영역에서 복잡한 정보를 저장하도록 하고,

말을 통해 이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교환하기 쉽도록 진화했다.

옹은 필요에 의해 "진지한 생각은 기억 체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적었다.

 

90쪽 발음과 통사론은 매우 리드미컬해지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되었으며,

정보는 기억의 편의를 위해 오늘날 '상투어'라 칭하는 평범한 관용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플라톤이 정의한 대로 지식은 '시'에 편입되었고, 시인학자라는 특화된 계층은 지식의 저장과 검색

그리고 전파를 위한 인간 도구이자, 피와 살 같은 지식 기술이 되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구어에서 문어로의 진보가 교육에서는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그리고

대학교육의 차이를 생각해 보게 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초등교육은 구어, 즉 '시'를 통해

학생의 사고를 불러 일으키고 그 정도의 수준에서 최상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든다.

그러면 중등교육부터는 어떻게 되어야 하며, 대학교육은 무엇을 구체화해야 할 것인가?

본질적인 인간 사유의 그 껍데기 씌우지 않은 생명 작용의 총화를 개인 인격에서는 어떻게 변질시키지 않고

오히려 심화시켜야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교육이 어떤 모습일까?

오늘날...)

(하브루타는 어떤 위상을 가질까? 이런 논리 위에서 볼 때, 말로 하는 대화...왜 하브루타가 생각을 깨우게 하는가?

실제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주시고 - 문자화해서 주시고, 모세의 율법을 기록해서

항상 그것을 옆에 두고 읽고 묵상하게 하셨는데...그런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법, 기록, 거래, 결정, 전통 등, 오늘날 문서화 되는 모든 것은 구어 문화에서는, 해블록이 말한 대로라면

"정형화된 시로 만들어져 노래로 불리거나 큰 소리로 연호되어"널리 퍼져야 했다.

 

먼 조상들의 구어 세계는 오늘날의 우리가 더 이상 알 수 없는 감정적, 직관적 깊이를 지녔을 것이다.

맥루한은 문자 사용 이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 특히 강렬한 "감각적인 몰입"을 누렸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읽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문맹인이나 문맹 사회가 경험했을 감정적인 몰입이나 감정으로부터의 상당한 단절"로

괴로워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구어 문화는 지적으로 보았을 때 여러 면에서 오늘날보다 더 피상적이었다.

글로 쓰여진 말은 개인의 기억력이라는 속박에서 지식을 자유롭게 했고

기억과 암송을 위한 리드미컬하고 형식적인 구조에서 언어를 해방시켰다.

이는 사고를 생각과 표현의 새로운 개척자로 이끌었다.

맥루한은 "서구 사회의 성과물은 확실한데, 이는 글을 읽고 쓰는 놀라운 능력에 대한 증거다"라고 썼다.

 

1982년 옹은 저명한 연구인 [구술 문화와 문자문화( Orality and Literacy)] 에서 비슷한 견해를 개진한다.

"일단 글쓰기가 정신을 사로잡은 이후 말로 이루어지던 문화는 더 이상은 불가능한 고급 문화에 대한

강력하고 아름다운 언어적 연주와 인간 가치를 생산해냈다"고 말했다.

91쪽

하지만 읽고 쓰기는 "과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문학과 여느 예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언어(말로 하는 연설을 포함해)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을 위해 진정 필요했다"고 말한다.

 

글쓰기 능력은 "매우 중요하며 인간 잠재력의 보다 완벽하고 내적인 실현을 위해 진정 핵심적인 것"이라고

옹은 결론 내렸다. "글쓰기는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야기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기와 이후 수세기 동안 고취된 의식은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알파벳이 가져다주는 인지적 혜택이 대중들에게 확산되기까지는 글로 쓰여진 작품들의 인쇄, 제작, 유통과

관련한 또 다른 일련의 지적 기술들이 발명되어야만 했다.

(지적 기술이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이것은 책의 앞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고

앞으로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거론되고 의미가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책 제목인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인간 존재는 생각하지 않고는 사람일 수 없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꼭 그의 말 때문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사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어떤 현상을 지적하는 것인가? 궁금하고 계속해서 저자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시가 가지는 위상과 오늘날의 의미에 대해서도 좀더 깊이 있고 넓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근본적으로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의 발전을 위해서 하브루타가 필요하고

질적인 교육 이해와 사람 이해, 그리고 문화와 사회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생각을 키우고 소통하는 길에 서서

더욱 나가기를 바란다.) 

마리 앙투아네트 관람 후(최대규).hwp

마리 앙투아네트을 관람하고 나서

보라매초등학교 수석교사 최대규

 

1.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기초 정보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화려한 비극, 엇갈린 두 운명

20141210일 오후 8~11

장소 : 샤롯데씨어터 A2B구역 1116

 

다음은 인터넷에 간단하게 소개된 뮤지컬에 대한 정보이다.

 

출처 : http://shopping.daum.net/product/#!/B1291576013

목걸이 사건, 바렌 도주 사건, 단두대 처형 등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라마틱한 삶과 거대한 역사 속에 숨겨진 진실!

18세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를 완벽 재현한 무대와 화려한 의상!
<모차르트!>, <엘리자벳>, <레베카>의 환상적인 듀엣

실베스터 르베이와 미하엘 쿤체의 신작!

국내외 실력파 제작진의 3년간의 치밀한 준비기간
한국 뮤지컬계에 돌풍을 일으킨 EMK뮤지컬컴퍼니의 제작 노하우가
집대성된 2014 최고의 기대작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

 

2. 문화 행사 관람

 

2014년도에 독서동아리를 시작할 때, 연중에 문화 행사를 하기로 계획하였다.

책을 읽고 독후 소감을 나누고 토론만 하기 보다는 그런 것을 기본으로 하되, 실제 공연 현장의 현장감을 느껴보자는 생각이었다. 연극이나 영화 관람, 또는 현장 답사 등을 이야기했었다. 그리하여 실행한 것이 뮤지컬 관람이다.

12월 바쁜 학교 교육과정 운영 중이지만 의미 있는 마무리를 위해서 큰 결심을 했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것이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관람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교과서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더 하여 조금 더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1세기 고도정보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뮤지컬의 연출과 경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점들도 많았다. 마지막으로는 뮤지컬 배우들의 혼신을 다하는 연기와 노래와 춤, 기타 모든 종합적 예술 활동을 통해서 던져주는 감동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3.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줄거리

“1779,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통치 시절, 국민들은 굶주림과 빈곤에 시달리지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필두로 상류층의 귀족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배고픔에 굶주린 마그리드는 우연히 만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히려 샴페인을 권하며 빈곤층의 어려움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 마그리드는 그런 마리 앙투아네트 얼굴에 그 샴페인을 끼얹는다.

1785, 오를레앙 공작의 배후 하에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온갖 비난을 뒤집어 쓰게 되고, 빈곤과 공포가 없는 세계를 추구하며 혁명의 길에 들어선 마그리드가 이끄는 시위대에 의해 파리로 강제 이동된다. 페르센 공작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왕실 일가를 구하기 위해 탈출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하고,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지금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미워하고 살았던 마그리드는 남편도 아이도 빼앗긴 그녀를 가까이서 보면서 혁명의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출처 : http://shopping.daum.net/product/#!/B1291576013

 

4. 관람 후의 소감

예술적 감흥은 대조적인 인물을 등장시켜서 반전에 반전을 겪게 하면서 사람의 정서를 자극할 때 크게 상기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런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는 점이 있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과 지저분한 뒷골목, 아름다운 보수적 관습적 왕비와 혁명을 이끄는 남성적인 여성, 이 뮤지컬에 대한 기자의 관전평을 참고로 하면 조금 더 다가오는 점들이 있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과 기상천외한 의상들로 눈길을 사로잡는 1막과 혁명군에게 붙들린 후의 모습을 담은 2막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1막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녀 같은, 혹은 철없는 모습을 그리지만 2막에서는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보여주는 강한 모성애와 죽음을 앞두고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는 기품을 보인다.

또 다른 주인공인 마그리드도 마찬가지. 1막의 마그리드가 오스트리아에서 온 왕비에 대한 분노와 혁명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면 2막의 마그리드는 여자로서 느끼는 마리에 대한 연민과 정의에 대한 고민을 표현했다.“

  (안이슬. ‘마리 앙투아네트’, 화려함에 숨은 혁명의 이면. 스타뉴스. 2014. 12. 9 http://star.mt.co.kr/stview.php?no=2014120917183732809&type=3)

 

우연인지 모르겠다. 요즘 아침 독서 시간에 두 도시 이야기를 원서로 읽고 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리는 프랑스 혁명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

“‘두 도시 이야기레미제라블의 혁명이 분노한 민중의 투쟁으로 그려졌던 것에 비해 마리 앙투아네트속 혁명의 모습은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하고, 왕권을 탐하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루머가 퍼져나가며 힘이 실리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물론 실제로도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루머가 퍼져 나갔고, 분노한 민중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혁명군의 부정적 면모와 고초를 겪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린 것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지점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안이슬. ‘마리 앙투아네트’, 화려함에 숨은 혁명의 이면. 스타뉴스. 2014. 12. 9 http://star.mt.co.kr/stview.php?no=2014120917183732809&type=3)

 

이 뮤지컬을 통해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더 세밀하게 생각할 점들이 많겠다고 느꼈다. 역사 시간을 통해 단편적으로 얻은 지식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재단하고 이야기하는지 반성하면서 더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삶의 비밀은 놀랍다. 화려한 것 같지만 그 속에 비참과 온갖 더러운 것들이 섞여 있고, 비참한 것 같지만 그 속에 참된 사랑과 순수와 마음이 깨끗한 것들이 섞여 있다. 그러니 함부로 단면만을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마치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는 권리자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애정을 가지고 한 사건, 한 인물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자신을 비추어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겸허하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이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자신을 얽어매는 사슬이 되고 말 것이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21세기 한국의 문예 역량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세계 속의 한류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문예 역량이 얼마큼이나 총체적으로 향상되고 세계에 내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지를 생각한다. 노래하는 뮤지컬 배우나 스탭들, 연출자들, 밴드... 어느 것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들 모두를 하나로 결집해서 무대에 올리는 실력을 칭찬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멋진 예술 작품을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관람하고 즐기는 관객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나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지만 우리의 수준을 더 높여가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저 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의 교양과 품위가 실제의 공동체의 삶 속에서 녹아져서 사람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의 장점이 극대화되어 수준이 높은 공동체로 이웃을 섬기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 시간에도 아프리카의 어려운 지역들, 북한의 인민들, 그리고 그렇게 멀리 가지 않고도 우리 대한민국에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 이 모든 이들과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함께 의식을 공유하고 노력해 가야 한다.

보라매 교사 독서 동아리가 일 년의 마무리를 이렇게 한다. 교사로서 무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귀한 생명들이 귀하게 존중받고 이들 역시 이웃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삶의 보람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교육을 다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그런 일에 우리의 독서 활동과 문화 예술 관람이 기여했으리라 믿는다.

마리 앙투아네트 관람 후(최대규).hwp
2.47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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