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니콜라스 카 지음/최지향 옮김. 청림출판. 2011
03-2 문자, 새로운 사고의 도구
86쪽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edrus)] 중에서
소크라테스 "글쓰기의 적절함과 부적절함에 대한 의문이 남는군"
파이드로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알파벳을 비롯한 많은 발명품을 만드는 등,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집트 신 테우스와 이집트 왕인 타무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
테우스는 타무스에게 글쓰기의 미학에 대해 설명하고, 이집트인이 그 축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
87쪽
"글쓰기는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현명하게 만들고 기억력을 향상시킬 것"이며, 그 이유는
"문자가 기억력과 지혜를 조합하는 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타무스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개발자 자신은 개발품의 가치에 대해 신뢰할 만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가 아님을 환기시킨다.
"인간은 예술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떤 이는 예술을 창조하고 어떤 이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예술이 주는
해악과 이익을 평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만든 글쓰기에 관해서는 진실과 정반대되는
효과를 선언하고 있군요."
이집트인들이 글쓰기를 배운다면
"이집트인들의 영혼에 망각이라는 것이 심어질 것. 글로 쓰여진 것에 의존하고 스스로 가진 것에서
기억을 되살리지 않고 외부적인 기록을 사용함으로 인해 기억 활동을 멈출 것"
(상당히 중요한 통찰이다. 고대부터 이런 인식이 있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오히려 새로운 문자의
사용에 대해서 익숙치 못한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처음부터 그런 위험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글자를 쓰지 말자는 것은 아니어야 하겠지만.)
글로 쓰여진 단어는 "기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암시를 위한 재료이며, 제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껍데기일 뿐"이라고도 말했다.
(정말 그렇다. 이 문자의 편리함이 있기도 하지만 이것이 지혜를 가리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이중성....)
또 지식을 위해 읽기에 의존하는 이들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 것도 모른다"고도 말했다.
그들은 "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대한 허영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생각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지혜가 무엇인가? 그런데 지혜를 알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지혜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21세기의 문화의 모습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을
들추어 내는지 모른다.)
분명히 소크라테스는 타무스의 견해에 수긍하고 있다.
그는 타이드로스에게 말하기를
"단순한 사람만이 글로 쓰여진 것이 지식과 대상에 대한 기록 중 최고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글자로 적혀진 단어보다 더 나은 것은 입을 통해 나오는 "학습자의 영혼에 새겨진 지적인 말"이라고 했다.
88쪽
소크라테스는 "망각하는 옛날과 달리 기억이 가능하다"며,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잡아내는 데 따른
실용적인 이익을 인정하지만 알파벳이라는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를 부정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주장한다.
외부 기호가 내부의 기억력을 대체하면서 글쓰기는 우리를 피상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만들며,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지혜로 향할 수 있는 지적인 깊이를 획득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중요한 통찰이었다. 지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은 어떻게 일어나고 생명의 작용의 총화로서
작용하는지 이 신비를 아는 것은 그야말로 난해한 일이다. 지식와 언어, 생각과 언어, 문자와 말....상징과 의미
지식과 지혜...겹겹이 둘러쌓인 비밀의 정원을 순례하는 것처럼 끝이 없는 생각에 들어가게 된다.
질적 이해라는 것도 그렇다. 글자로 표현되어지는 것들, 그 문자의 논리 안에서 과연 실체를 잡아낼 수 있을까?
많은 글쓰기를 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 이것의 한계와 또 그것의 장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을 이해하고 문화를 이해하고 그 실체를 붙잡고 진리 안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교육을 바르게 할 수 있을까? ..........)
연설가인 소크라테스와 달리 작가였던 플라톤은 읽기가 기억을 대체하고 내면의 깊이를 잃게 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우려에 어느 정도 공감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말에 비해 글이 지니는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도 확실하다.
[파이드로스]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기원전 4세기- 우리나라는 원삼국시대 이전 부족국가 시대였지...)
알려진 [국가론 The Republic)]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 유명한 의미심장한 문단이 나온다.
즉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무리하게 '시'를 공격하게 해 자신의 완벽한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시를 문학의 일부로, 글쓰기의 한 형태로 여기지만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는 쓰기보다는 읊는 대상이자 읽기보다는 듣는 것으로서 고대 구어식 표현을 대표하는 동시에 보편적인
그리스 문화뿐 아니라 여전히 그리스 교육 제도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시와 문학은 지적인 생활에 있어 상반되는 이상을 표현한다.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플라톤의 이 말은 시에 반하는 주장이 아니었다.
(아니 그럼 뭐지?)
시인 호머뿐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이 지켜온 것이기도 한 구전의 전통에 대한, 또한 이 방식이 반영되고
권장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반대였다.
89쪽
영국학자 에릭 해블록(Eric Havelock)은 [Preface to Plato(플라톤 서설)]에서 "사고의 구어적 단계"는
플라톤의 '주적이었다"라고 적었다.
(사고의 구어적 단계와 문자적 단계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생각이 어떻게 표현되는가의 문제인가?
그로 말미암은 어떤 구조들이 작용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플라톤의 시에 대한 비판이 암시하는 바는 해블록, 옹, 그리고 여러 고전학자들이 제시한 바대로
글쓰기라는 새로운 기술과 이 기술이 독자들에게 권장한 사고방식, 즉 논리적이고 단호하며 독립적인
방식에 대한 옹호였다.
플라톤은 알파벳을 통해 문명이 얻을 수 있는 지적 혜택을 목격했는데, 이 혜택은 이미 플라톤 자신의 글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었다. 옹은 "철학적으로 논리적인 플라톤의 사고는 글쓰기가 정신 작용에 미치기 시작한
영향력 덕분에 가능했다"고 적었다.
(과연 그런가? 논리와 언어, 특히 문자 언어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의 발전, 논리적인 전개가
문자라는 기호의 도움을 얻어서 더 고도적으로 전개되는 것인가? )
[파이드로스]와 [국가론]에 나타난 글쓰기의 가치에 대한 미묘하게 상반되는 시각을 통해
우리는 말하기에서 쓰기 문화로의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식한 결과이며, 도구, 즉 알파벳의 발명에서
기인한 변화였다.
또한 이 도구가 우리의 언어와 사고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이다.
완전한 구어 문화에서 사고는 인간 기억력의 지배를 받는다.
지식은 기억해내야 하는 무엇이며, 기억해내는 대상은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생각이지...물론) 내에서 가능하다.
인간이 문자 없이 살았던 수천 년 동안 언어는 개인의 기억 영역에서 복잡한 정보를 저장하도록 하고,
말을 통해 이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교환하기 쉽도록 진화했다.
옹은 필요에 의해 "진지한 생각은 기억 체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적었다.
90쪽 발음과 통사론은 매우 리드미컬해지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되었으며,
정보는 기억의 편의를 위해 오늘날 '상투어'라 칭하는 평범한 관용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플라톤이 정의한 대로 지식은 '시'에 편입되었고, 시인학자라는 특화된 계층은 지식의 저장과 검색
그리고 전파를 위한 인간 도구이자, 피와 살 같은 지식 기술이 되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구어에서 문어로의 진보가 교육에서는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그리고
대학교육의 차이를 생각해 보게 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초등교육은 구어, 즉 '시'를 통해
학생의 사고를 불러 일으키고 그 정도의 수준에서 최상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든다.
그러면 중등교육부터는 어떻게 되어야 하며, 대학교육은 무엇을 구체화해야 할 것인가?
본질적인 인간 사유의 그 껍데기 씌우지 않은 생명 작용의 총화를 개인 인격에서는 어떻게 변질시키지 않고
오히려 심화시켜야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교육이 어떤 모습일까?
오늘날...)
(하브루타는 어떤 위상을 가질까? 이런 논리 위에서 볼 때, 말로 하는 대화...왜 하브루타가 생각을 깨우게 하는가?
실제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주시고 - 문자화해서 주시고, 모세의 율법을 기록해서
항상 그것을 옆에 두고 읽고 묵상하게 하셨는데...그런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법, 기록, 거래, 결정, 전통 등, 오늘날 문서화 되는 모든 것은 구어 문화에서는, 해블록이 말한 대로라면
"정형화된 시로 만들어져 노래로 불리거나 큰 소리로 연호되어"널리 퍼져야 했다.
먼 조상들의 구어 세계는 오늘날의 우리가 더 이상 알 수 없는 감정적, 직관적 깊이를 지녔을 것이다.
맥루한은 문자 사용 이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 특히 강렬한 "감각적인 몰입"을 누렸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읽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문맹인이나 문맹 사회가 경험했을 감정적인 몰입이나 감정으로부터의 상당한 단절"로
괴로워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구어 문화는 지적으로 보았을 때 여러 면에서 오늘날보다 더 피상적이었다.
글로 쓰여진 말은 개인의 기억력이라는 속박에서 지식을 자유롭게 했고
기억과 암송을 위한 리드미컬하고 형식적인 구조에서 언어를 해방시켰다.
이는 사고를 생각과 표현의 새로운 개척자로 이끌었다.
맥루한은 "서구 사회의 성과물은 확실한데, 이는 글을 읽고 쓰는 놀라운 능력에 대한 증거다"라고 썼다.
1982년 옹은 저명한 연구인 [구술 문화와 문자문화( Orality and Literacy)] 에서 비슷한 견해를 개진한다.
"일단 글쓰기가 정신을 사로잡은 이후 말로 이루어지던 문화는 더 이상은 불가능한 고급 문화에 대한
강력하고 아름다운 언어적 연주와 인간 가치를 생산해냈다"고 말했다.
91쪽
하지만 읽고 쓰기는 "과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문학과 여느 예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언어(말로 하는 연설을 포함해)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을 위해 진정 필요했다"고 말한다.
글쓰기 능력은 "매우 중요하며 인간 잠재력의 보다 완벽하고 내적인 실현을 위해 진정 핵심적인 것"이라고
옹은 결론 내렸다. "글쓰기는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야기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기와 이후 수세기 동안 고취된 의식은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알파벳이 가져다주는 인지적 혜택이 대중들에게 확산되기까지는 글로 쓰여진 작품들의 인쇄, 제작, 유통과
관련한 또 다른 일련의 지적 기술들이 발명되어야만 했다.
(지적 기술이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이것은 책의 앞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고
앞으로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거론되고 의미가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책 제목인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인간 존재는 생각하지 않고는 사람일 수 없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꼭 그의 말 때문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사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어떤 현상을 지적하는 것인가? 궁금하고 계속해서 저자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시가 가지는 위상과 오늘날의 의미에 대해서도 좀더 깊이 있고 넓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근본적으로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의 발전을 위해서 하브루타가 필요하고
질적인 교육 이해와 사람 이해, 그리고 문화와 사회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생각을 키우고 소통하는 길에 서서
더욱 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