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대학에 가다. 제임스 사이어. 김성현 역. IVP. 1998

개인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의 도전에(13)

 

제13장 신앙의 공적인 얼굴

 

150쪽 기독교는 구원을 받고 그 다음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저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공부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했다. 교실에서 하는 질문도 주로 다른 학생들은 묻지 않는 것이었다.

졸업 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달랐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루 24시간 전체에 해당된다는 사실이었다.

 

ㅡ다시스의 배들 그리고 기독교의 공적인 얼굴-

151쪽 사생활화

152쪽   교회는 구원의 메시지에만 관여한다고 말하는 부류가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은 평신도건 성직자건 모두 복음 전도자가 되어야지, 사회 전체를 질서 있게 운영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그런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체계적인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는, 즉 체계 자체를 개선하는 일에는 거의 고민이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

 

153쪽 일부 교회의 사회적 정의와 문화적 역할을 강조하는 부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는 사적인 것에 국한되어 왔다.

오스 기니스가 지적하는 대로 사생활화(privatization)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의 골짜기가 점점 깊어지는 과정"이다.

 

공(public)   사(private)

 객관적      사실(fact)

                과학적 방법을 통해 얻어진 진리

                메커니즘

 가치(value)    주관적

 신념

 의견

 목적

 사회적      정부

                법률

                기업

                기업 윤리

                생산(기술)

                직업

                경제

                과학

 종교               개인적

 윤리

 쾌락

 개인 윤리

 소비

 여가

 삶의 양식

 신학

         <공과 사의 분리>

 

공적인 부분에서는 메커니즘, 시스템과 사실(과학적 방법을 통해 얻어진 진리)이 지배한다.

이 곳은 법칙과 법률의 영역, 객관적 기준이나 공공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질서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고용되면, 그는 회사가 지정하는 시간에 일해야 한다.

제조 과정은 재료의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154쪽 한편 사적인 부분에는 엄청난 자유가 있다.

'가치'(각 개인의 신념에 따른)가 바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더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통제하지 않는) 원리이다.

가치는 변할 수 있으며, 심사숙고를 통해서건 사회적 조절에 의해서건 그냥 기분에 의해서건 어떻게 형성되었든 각 사람의 의견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여가를 보면, 조깅을 할 수도 있고, 춤을 추거나 수영을 하거나 카드 놀이를 하거나 오라토리오 모임에 가입하거나

멍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웃을 수도 있다.

무슨 음식을 먹을지, 무슨 옷을 입을지, 모슨 차를 몰고 다닐지, 어떤 휴가를 선택할지에 대해 거의 무한한 선택의 여지가

(물론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서 제한이 있지만)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 문제에서도 아무도 특정한 무언가를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불변의 진리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긴장이 있다. 아무도 불변의 진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까 그것을 강요하지 못하고

최고의 가치인 개인이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개인주의가 지배하기 전에는

가문에 의해, 또는 민족에 의해서, 또는 기타 집단에 의해서 종교가 강요되었다.)

무엇을 믿든 괜찮다. (그리고 본인의 책임이다.)

 

이런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의 양극화의 결과는 사회의 여러 부문들을 서로 분리시켜 놓았다.

 

155쪽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의 공공 문제들-조세법, 도시 구역, 국제 관계, 극빈자 주택, 실업, 교육,

미묘한 인종 차별 - 을 무시한다.

몇 가지 예외를 들어 보면 오히려 이 사실이 두드러진다. 낙태, 안락사, 동성애와 여성 문제들, 이런 문제들은 교회에 존재하는

 몇 한 되는 사회 참여 운동가들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 그리스도인들 중 매우 적은 수만이 이런 문제들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근거 있는 의견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156쪽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 되심

 

사생활화는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능력을 빼앗아가 버렸다.

우리 삶의 사적인 부문과 공적인 부문을 통합하도록 격려해 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직장과 가정은 갈라져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그런 이중적인 환경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역시 갈라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인물이

되기 마련이다. 직장인 서 씨 그리고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그리스도인인 서 씨.

 

그러나 이런 상황은 아주 비성경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삶의 모든 영역은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

(예수님이 어떠하셨는지에 대해서 더 잘 살펴야 한다. 비성경적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그러나 그분이 팔레스틴에서 어떻게 사셨는가?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그 통치의 양식과 형태가 어떤 지에 주목해야 한다.

로마 식민지 하에 있던 팔레스틴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서 모두다 간섭하시지 않으셨다.

무슨 운동을 벌리신 적이 없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여 사는 삶인가? 거룩한 삶인가?

하나님의 법은 자유케 하는 법이다. 그 법을 부지런히 탐구하여 자유를 얻게 하시는 분이 성신님이시고, 그런 힘을 주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신이시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권능으로 이 세상을 유지하시고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주의 교회를 세우시고 영원한 나라를 이루어가시는지 참으로 놀랍고 기이하다.

탐구의 주제이며, 삶의 원동력이 된다. )

 

157쪽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임아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바울 사도는 보이지 않는 것들 중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왕권, 주권 권력, 권세,

이것들은 1세기에 사회적, 정치적, 영적인 세력들을 나타내던 용어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영역-공적이든 사적이든-에서 주이시다.

 

구세주로서의 역할 때문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포괄성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8-20)

그리스도는 교회를 다스리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화목시키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피조계 전체를 자신에게로 돌이키고 계신다.

 

다시스의 배들

 

그 화목이 어떤 모습일지 희미하게라도 그려 볼 수만 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공적인 부문과 사적인 부문이 통합되고 구속될 수 있을지를

보게 될 것이다.

 

158쪽 히브리 성경은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영광에 대한 것도 약간 보여 준다.창조에 대한 본문을 짧지만(창 1-2장)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세상에 대한 언급은 념쳐난다.

시 19:1-2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모두 하나님을 창조주요 땅을 돌보시는 분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타락하여 반역하는 존재로 보았고, 땅은 인간의 죄로 더렵혀진 곳으로 보았다. 인류의 시초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있었다.

그래서 땅은 저주받았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 헐뜯었으며, 출산에 고통이 따르고 힘든 노동의 땀이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부가되었다.

각 사람의 땅 위 여정의 마지막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구약 성경은 인간의 악과 고통에 대해 잔인하게도 현실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폭도들에게 딸을 바치며, 복수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기 위해 시체를 조각 내어 이웃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한 여성은 적군 장수의 이마에 장막을 지탱하는 못을 박아 넣는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8세기 전 가장 유명한 예언자 이사야는 자신의 시대의 가증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 9:18-21

 

159쪽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회의 모든 층에 영향을 미쳤다. 남성, 여성, 어린이, 소떼와 양떼, 땅과 바다 모두 영향을 받았다.

사 56:9-10

 

이사야가 묘사하는 그런 사회에서 의인이 가진 유일한 평화는 죽음이 주는 평화였다.

사 57:1-2

자신의 시대의 고통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이사야는 하나님이 미래에 세울 성, 곧 언덕 위에 세워져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찬 시온성의

황홀함을 바라본다.

 

사 60:1-3

 

160쪽 그러고 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아들 딸들이 시온으로 무리지어 돌아오는 것을, 또한 그들이 게달의 양떼와 시바의 낙타떼들에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4-7절)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스의 배들이 등장한다.

 

사 60:8-10

 

"다시스의 배들이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라고 신학자 리처드 마우(Richard Mouw)는 질문한다.

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시온으로 오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거룩한 성의 환상을 보아야 한다.

거기서 요한은 '성령 안에서'(계4:2) 본 것을 묘사한다.

계 21:1-2

161쪽 한 천사가 성을 측량하고 있다.

길이, 폭, 높이가 각각 2,200km인 커다란 정육면체와 같은 성이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18절)

하늘에서 구며져 땅으로 내려진 초월적인 성이 나타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이사야로부터 이 형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사야가 시온을 땅에 있는 성으로 보는 듯한 반면,

요한은 거룩한 도시를 초월적이고, 외부로부터 온, '위로부터' 내려진 것으로 본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 21:23-24)

 

그렇다면 이 거룩한 성에서 이방의 배들과 이방의 왕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우는 믿기를, 그리고 필자도 여기에 동의하는데, 멀리서 오는 이 배들과 성에서 '섬기는' 왕들은 인간의 문화적 '업적들'(filling)을

모아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사야와 요한은 모두 왕들이 들어오는 것을 이것에 연결시킨다.

땅의 왕들은 '나라들의 재물'을 거룩한 성으로 들여올 것이다.

 

여기에는 큰 신비가 있다. 그것은 분명하지 않은 신비이고 여기서 불필요하게 추측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지는 드러난다. 각 나라들의 재물이 천국 도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들 중 무언가는 천국의 가구 중 일부로 들여질 것이다.

 

162쪽 헨델의 메시야, 바하의 브란덴부르그 협주곡,

'친절과 사랑의 조그만 행동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낮은 자들 속에 자리를 잡고, 땅의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과 함께 하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행위가, 변화된 성에서 맞을 청산의 날에 우리의 행적으로 계산될 것임을 확신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므로 그 나라의 규범과 형태에 정치적으로

맞추어 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기독교의 공적인 얼굴 : 우리가 처한 곳에서 본연의 자세를 갖는 것

 

163쪽 창조와 타락으로부터  구속과 영광으로의 성경적 역사를 한꺼번에 이해하려는 시도에 묻혀 구속에 대해서 잊어서는 안 된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인간 존재의 고통으로부터 거룩한 성에서의 영원한 삶의 황홀함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십자가는 구세주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교회에게도 현실이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외치며 오셨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분의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구조에 철저하게 맞게 사는 사람,

타락한 세상의 상황에서 거룩한 성의 삶의 양식을 살아내는 사람의 행동이다. 왕국의 윤리에 따라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이 죽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조건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마음을 새롭게 함과 삶의 성화로 변화되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시민으로서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닦아놓은 단 한 번의 희생 제사였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 : 34-35)

 

164쪽

신자의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처럼 사회에 순응하지 않는 데 대한 대가여야 한다. 이것은 거부하는 세상에서 앞으로 다가올 그 질서를

대표하는 사회적 현실이다. (Jones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72. p.97)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 곧 왕국의 가치관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산상보훈 적 삶 마 5-7장

예수님의 비유들은 이런 생각을 더 자세하게 풀어서, 실제 행동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 주며 또한 바울이 쓴 서신들의 후반부도

우리에게 많은 지침을 준다.

 

기독교의 공적인 얼굴은 그 도안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할 장소에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그들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Lesslie Newbigin. Foolishness to the Greeks.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86. p.124

   현대 서구 문화와 기독교. 기독교서회)

 

 165쪽 우리 시대의 도전은 바로 우리가 처한 곳에서 우리의 본분을 찾는 것이다.

모든 나라, 모든 삶의 영역 위헤 하나님의 주권의 표징이 되고, 도구가 되며 그 주권을 미리 맛보게 해 주기 위해.

(how ?  소리쳐 부르짖음으로? 사회적 압력단체가 됨으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 도구가 됨으로?

이름높여 광고하고 시위하기보다는 소리없이 낮은 곳에서 봉사함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이 고함쳐 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게...)

 

엄청난 과업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 형편없은 상황에 처해 있다. 삶의 모든 부분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로 끌고 올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함께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하나씩의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역할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밤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일을 마치고 나면,

여러분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166쪽 우리 자신이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한 작은 부분이다.

지구의 전 역사가 자신 앞에 펼쳐져 있다. (역사적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예배)

창조, 타락, 수천 년의 세월, 아브라함을 부르심, 출애굽, 예수의 탄생, 삶, 죽음, 부활, 온 세계에 걸친 교회의 형성과 성장,

예수의 재림, 인류의 심판,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온 성, 시온으로 들어오는 다시스의 배들, 나라의 재물을 성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왕들.

 

167쪽 하나님 나라의 속의 인간이 처음에는 지구와 지구의 역사라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리고 온 우주라는 더 큰 틀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었다. 동시에 겸손해지면서도 자랑스러운 느낌이 들엇다.

그렇다.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

 

그저 한 사람으로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 전체와 연결된 사람이었다.

 

* 생각하는 사람이 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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