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113쪽
<굴종인가, 사랑으로 섬기는 것인가?>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의 셋째 질문
"그대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전심으로 그분을 섬기고......
살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분을 섬길 수 있으며 또한 섬겨야 한다.
요점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섬길 것인가 이다.
114쪽
하나님이 섬김을 받으셔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서기관들 사이에서도
결코 논쟁이 된 적이 없다. 그것은 쟁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섬김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주님과 그들 사이에 날카로운 논쟁이 있었다.
이렇게 대립이 격화되자,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주님의 이 부르심을 가리켜 '인생의 근심과 어려움에 지친 사람들과 죄 짐에 눌려 낙심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라고 이해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우선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사람들에게 부과한 어렵고 무거운 '의무들'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의무들로 인해 여러 가지로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이 백성에게 부과한 의무들이 금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얼마나 큰 어려움을 주는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강압적으로 의무를 완전하게 수행하라고 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억눌렀다. 특히 그들은 백성에게 어떠한 마음의 평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백성들은 위로와 확신을 모두 빼앗겼다. 그들은 일평생을 자신이 수행한 의무들이 충분한지에 대한
불확실한 가운데 살았으며, 삶을 평가할 저울 눈금이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지 불안해 하였다.
115쪽
그러므로 구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짐이 무거우면 나에게 단순히 오기만 하여라. 내가 너에게 쉼을 주겠다.
너에게 부과되었던 짐들을 풀어 주겠다'고 하신다. 바리새인들은 무거운 멍에를 가지고 왔으면
사람들은 그 아래서 짓눌렸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
주님께서 주신 짐이 쉽고 가벼운 이유는 그 의무들이 광범위하거나 철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계명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어렵고 불확실한 것으로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근간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과 구원의 확실성이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 아래서는 그 의무가 힘들고 노예 생활과 같은 고역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아래서는 그 의무가 즐거운 것이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되었다.
<셋째 질문은 요리문답의 제3부와 비슷>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의 셋째 질문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3부는 아주 흡사하다.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은 둘째 질문에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자기를 미워하는지 그리고 여러분의 생명을 여러분 밖에서 곧 그리스도에게서만 찾는지'를
질문하고, 이어서 셋째 질문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 묻는다.
116쪽
이와 유사하게 요리문답은 우선 우리의 비참함을 말하고,
그 다음으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말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제3부에서는 우리의 감사에 대해 말한다.
잠시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에게로 돌아가 보면, 그들은 다른 순서를 선호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순서상 맨 앞이었다.
그들의 교훈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길을 진척시키고
또 유지하여야 했다. 실제로 그들의 가르침을 보면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를 다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들이 그 일에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께 자신들을 구원하셔야 할 부담을 가중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섬김을 가리켜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고 말한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5)
하고 묻는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바울 시대의 유대주의자들과 후대의 로마 가톨릭은 모두 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구원을 이루어 낸다. 그 섬김 가운데 여러분이 열심히 행하는 선한 일들이
여러분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인 바울의 교훈을 따르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감사로 인해 선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17쪽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셨고 이제 그분의 성신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은 우리에게 감사의 '이유'만을 준 것이 아니다.
그분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또한 그분의 성신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우리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시었다.
<감사는 신자의 삶에 본질적인 것>
이런 감사의 섬김은 신자의 삶에 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히 12:14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감사에 대한 부분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묻고 답한다.
87문 "감사치도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을 계속 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118쪽
고전 6: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신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전심으로 원한다고 고백하십니까?>
공적 신앙고백 예식문의 셋째 질문에서 '전심으로 원하는가?'에 대하여 묻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을 보면 "그대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언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느다. 다만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렇게 행하기를 원하는가'를 묻고 있다.
119쪽
이 질문은 인생의 가장 깊숙한 영역인 '마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시편에서는 그러한 것들, 즉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잠언의 말씀을 들어보자.
잠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주짐은 우리로 마음에 있는 그릇된 욕구들을 간과하게 놔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주님의 계명을 구약보다 더욱 날카로운 잣대로 우리 앞에 두신다.
주님은 '나는 마음을 본다. 네 마음은 나와 나를 섬기는 일을 향하고 있는가?'하고 말씀하신다.
120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해설하는 마지막 부분(114문답)을 보면,
이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114문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이러한 순종을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일부 계명만이 아니라
모든 계명에 따라 살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전심으로 갈망하는 목표를 열심히 좇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문답은 그다음 질문에서
".......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엄격히 십계명을 설교하게 하십니까?"하고 묻고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 성신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문 답)
마음으로 간절히 찾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하고 말씀하셨다.
121쪽
그리고 이 땅의 보화와 하늘의 보화가 다른 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 땅의 보화는 일시적이고 좀과 녹이 다 먹어 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반면에 하늘의 보화는 영속적이다. 우리가 이 땅의 보화들을 추구하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보화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상과 욕망의 근원인 우리의 마음은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늘의 보화로 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 하늘의 보화들 안에서만 우리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지는 이것이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가?'
요리문답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사람의 참된 회개와 회심을 이야기할 때에,
옛사람과 새사람을 이야기한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든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또한 점점 더 그런 죄를 미워하고 피하는 것을 말한다.
새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고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88-90문)
122쪽
그것은 곧 자신의 죄악을 진심으로 후회하며 주 하나님을 섬기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마음'을 주께 드리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기를 원한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
셋째 질문에서는 섬김과 사랑을 함께 언급한다.
"그대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전심으로 그분을 섬기고,
세상을 버리며
그대의 옛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서
오직 성신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섬김은 사랑의 섬김이다.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는 단지 사랑을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있어야 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쉽다. 아모시 시대에 사람들은 시온의 노래, 즉 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공의를 쓴쑥으로 바꾸었다.(암 5:7)
123쪽
그들의 공의를 사랑을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쓰라림을 가져왔다.
암 5:12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사회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공의를 지키는 자들을 대적하였다. 돈이 없는 사람은 공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뇌물을 받았으며 비리의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신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3)
그보다 조금 앞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암 5;21)
사랑을 행하지 아니하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노래나 기도로 사랑의 단어들을 표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계명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노래하고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께는 불쾌한 사람일 뿐이다.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그분을 섬기고" 하며 고백하는 것은 모호한 선언도 아니고
그저 친밀함을 나타내는 말도 아니다.
이러한 고백은 진셈에서 우러나는 갈망이며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계속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124쪽
이것은 단지 선한 의도만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반응하여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여호수아가 그 말을 했을 때, 이 말은 대립되는 양날을 가진 선언이었다.
'주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든지 하라'
당시에 우상들은 종류가 무척 다양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를 섬기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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