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5)

 

<방학>

165쪽 서당에는 여름 방학이 없었다. 날씨가 아주 더워지면 보통 때보다 공부 시간을 조금

줄였을 뿐이었다. 물론 일요일도 없었고, 한 달에 이틀만 놀았다.

그러나 새학교에서는 일요일은 휴일이었고, 여름에는 한 달 동안이나 편하게 보낼 수가

있었다.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166쪽 아버지도 이 제도를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멀리 떨어진 시골에 있는 유명한 훈장님한테

가서 습자를 더 공부하든지, 아니면 아버지 곁에서 한문책을 옮겨 쓰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습자 연습을 더 하길 바라셨다. 나는 아버지 곁에 있기로

결정했다. 나는 가는 붓 여러 개와 새 공책을 받았고, 거기에 쌀알만한 크기의 글자로 채워야만

했다. 매일 아침 원문을 두 쪽씩 배우고, 오전 내내 그것을 옮겨 썼다. 아버지는 내게 많은

글자를 반복해서 연습시키고, 때로는 전면을 다시 쓰게 하셨다.

오후에는 흰 돌과 검은 돌로 겨루는 바둑이란 고상한 놀이를 배웠다.

 

167쪽 "소리가 멈출 때까지 기다려라. 그런 다음 너의 돌을 놓되, 절대 경솔하게 놓지 말아라."

 

174쪽 "중국 사람은 너무 보수적이야. 전에 비단 장수 유 씨에게 상투는 구식이니 깎는 게 좋겠다

고 말했다가 욕만 실컷 얻어 먹었거든

175쪽 '유럽을 오랑캐나라다. 그 곳에는 공자가 가르치는 윤리 도덕이 전혀 없다.'

'보수적'이라는 말은 별로 좋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이 '바보' 또는 '완고'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다. 중국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보수적이라면 그건 정말 유감이었다.

나는 중국이 왠지 아름답고, 부드럽고, 훌륭한 나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양자강'이나

'동정호', '서주' 혹은 '항주'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또는 '소동파'나 '도연명'의 시 몇 구절을

읊기만 해도 내 앞에는 황홀한 세계가 전개되었다.

셋째 누나와 어진이 누나도 중국 소설을 많이 읽은 까닭에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느꼈다.

그들도 양자강 계곡의 아침 안개나 달빛에 반짝이는 요양 숲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저 훌륭한

중국을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좋아했고, 심지어는 그들이 '동방의 작은 나라'라 보르는 우리 나라

보다도 더 좋아했다.

 

180쪽 우리가 적은 민족이고, 작은 나라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저 크고 위대한 중국도 일찍이 우리의 선조들이 현명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작은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81쪽 일본에 문자와 철학, 종교와 건축, 그 밖에 많은 것을 전해 준 나라가 바로 우리가 아닌가!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일본보다 조금 뒤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매우 영리한 민족이었다.

압록강은 흐른다(4)

 

<신식학교>

133쪽 신식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일찍부터 들어 왔고, 지난 가을부터는 부모님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하셨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주 신기한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서는 학생들에게 고전 한문도, 습자도 시 같은 것도 가르치지 않고, 대양의 서쪽

유럽이라는 곳에서 수입해 온 신식 학문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그곳이 지구의 어느 곳에

있는지, 그 학문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몰랐다.

134쪽 어떤 사람들은 고등 산수와 어려운 의술을 가르친다고 말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지리학과 천문학까지 가르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 학교에서 한학은 가르치지 않아서 아이들을 망쳐 놓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과 오랫동안 상의하여, 나를 일 년 동안 그 곳에서 교육시키기로

결정하셨다. 내 나이 열한 살이지만 나이에 비해 고전을 잘 읽어 냈기 때문이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내가 몇 달 전에 배운 '중용'과 '맹자'로 당분간은 할 만했으나, 그 다음에 배워야

할 책들이 나에게는 역시 너무 어렵다고 하셨다.

 

부모님이 신식 학교에 가고 싶으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나는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문이며 기타 한 시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믿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가 보겠습니다."

 

<시계>

150쪽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나는 자연 시간에 조금 알아들은 것과, 유럽에 관해서 들은

새로운 것들을 아버지께 이야기해 드리기 위해 곰곰이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아버지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새로운 것이라면 기쁘게 들으셨다.

나는 들은 것을 모두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고, 조금이라도 유럽에 관한 것은 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 유럽 글자가 적힌 종이 조각이며, 고층 건물이나 철교, 탑, 사진 등, 이

모든 것을 아버지는 오랫동안 세밀히 살펴보곤 하셨다.

 

151쪽 기섭이는 한동안 유럽에 살았던 중국 황태자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황태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작별 인사 겸 그 동안의 호의에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그 나라의

제일 높은 사람을 찾아갔었다. 그는 마침 성 밖에서 자길이 많은 길을 청소하던 정원사를

만나, 그에게 주인을 만나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원사는, "내가 바로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유럽에는 다른 미개국에서와 같은

그런 주인도 없고 종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더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무척 즐거워하셨다.

아버지는 기쁨에 차서 말씀하셨다.

"유럽 사람이 바로 진정한 사람이야."

 

162쪽 누나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자도 없고, 깊은 뜻도 지닌 고전 문구도 없어. 너는 이 책으로 현명해지리라고 믿니?"

"이 책에서 너는 뭘 배우니?"

누나는 거만한 태도로 책장을 넘기며 물었다.

"참 딱하구나. 너는 이미 중용도 읽었고, 또 많은 옛 한시를 외울 줄 알고, 심지어 율곡의 일화

까지 옮겨 써 보았잖니? 그런데 이제 이런 가치도 없는 책으로 너의 재능을 낭비하고 있잖아."

 

어진이 누나는 영리했다. 책 읽기를 좋아했고, 많은 일화며 소설들도 제법 읽었다. 어머니도

미처 모르는 고전 문장을 외우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리 남매들 중에서 어진이 누나가 가장

영리하다고 했다. 또 나를 자주 꾸짖는 유일한 누나였다. 누나는 내 글씨가 엉망이고, 내 말은

멋과 위엄이 없다고 꾸짖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는 누나와의 대화를 피했다.

"새 학문은 달라."

마침내 나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63쪽 "이 책에서는 매일 수천 리를 달리는 기차를 어떻게 만드는지, 그리고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과, 전력을 이용해서 불을 켜는 방법들을 가르쳐 줘."

"그러니까 너는 현인이 될 수 없어."

누나는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지금은 다른 시대가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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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3)

 

공식적인 한문 교육은 이렇게 아버지와 훈장 선생님들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또다른 교육의 통로가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의 세계를 통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전래의 세계관을 담보하고 있는 옛날 이야기였다.

 

45쪽 내가 이렇게 혼자 누워 있을 때면, 가장 어린 셋째 누나가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 누나는 나보다 두 살 더 많았고, '셋째'라고 불렀다. 그녀는 성격이 좀 특이했다.

저녁 때면 뒤 뜰에 모여 앉아 재잘거리고, 온갖 장난을 즐기는 다른 누나들이나

사촌 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려 했다. 그 대신 나한테 자주 찾아와서 옛날 얘기를

해 주곤 했다. 셋째 누나는

46쪽 별과 해와 달은 물론이고, 제비와 호랑이, 가난한 농사꾼과 나무꾼들에 관한 우화나

동화를 많이 알고 있었다. 누나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48쪽 누나는 이야기책과 연애 소설을 즐겨 읽었다.

누나가 읽는 책은 어려운 한자로 쓰여진 책이 아니고, 약 스무 자 가량으로 이루어진 알기

쉬운 한글로 쓰여진 것이었다. 한글에서 낱낱의 글자는 '하늘', '땅', '해'와 같은 단어가 아니고,

'아','오','에','가','나' 처럼 낱글자라고 셋째 누나가 하나하나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누나는 아주 일찍부터 유모에게서 한글을 배웠기 때문에, 한글로 쓰여진 소설을 읽을 수가

있었다. 대부분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다른 여자들도 그런 소설을 읽곤 했다.

셋째 누나는 내게 가르쳐 주는 것을 좋아했다. 누나는 내게 셈과 기념일과 생일, 그리고

다른 중요한 날들을 일러 주었다.

 

 

<남문에서>

55쪽 거의 모든 성당 아이들이 우리 둘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공부에서도 그들이 우리보다

앞섰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몇몇은 벌써 '당시선'을 읽었고, 운율을 연습하고 있어서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였다. 그 책에는 언제나 꽃과 비, 달빛과 술잔의 시정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애들은 열다섯 권으로 된 '통감'이란 큼직한 역사책을 읽었다. 그 책을

흥미 진진했다.

56쪽 국가가 서로 싸우고, 왕조가 몰락하고, 다른 한 왕조가 다시 세력을 잡는 내용들이었다.

수암과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아칙도 '삼강오륜'과 짧게 간추려진 한국 역사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도 마침내 이 책을 다 떼고 큰 역사책의 첫 권을 손에 들었을 때, 그 기쁨이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아침마다 서당에 훈장님이 오시면 우리는 모두 그에게 공손하게 큰절을 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전날 배운 것을 시험봤다. 시험을 잘 본 아이는 새 과제를 받았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어제

것을 다시 공부해야 했다. 시험이 끝나면 아이들은 저마다 벼루를 꺼내어 먹을 갈았고,

훈장님으로부터 새 습자 교본을 받아 글씨 연습을 했다.

그리고 짧은 쉬는 시간이 끝나면 그 날 배운 것을 읽었다.

큰 소리로 저마다 다른 곳을 읽었기 때문에, 서당 안은 마치 벌집처럼 시끄럽고 와글댔다.

오후에는 오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여름이면 우리는 가끔 멱을 감으러 냇가로 몰려갔다.

 

60쪽 날이 저물고 밤이 깃들기 시작하면, 이 고을 사람들은 걱정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밤의 고요가 밀려왔다. 집집마다 저녁 연기가 피어 오르고, 회색 지붕들은 서서히 여름 밤 안개

속으로 잠겨 갔다. 제일 높은 산봉우리만이 여전히 푸른 하늘 속에서 마지막 햇살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슬퍼지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낮이 지나 신비스런 밤에 둘러싸이

는 데서 오는 적막한 느낌이리라.

 

<칠성이>

69쪽 우리가 다시 제기를 차고 있는 동안, 칠성이는 주머니에서 단소를 꺼내어 불기 시작했다.

그는 두툼한 입술로 처음에는 발랄하고 빠른 곡조롤 시작해서, 나중에는 즐거웠던 지난 날을

회상케 하는 느리고 구슬픈 곡을 불었다. 나는 황홀한 느낌에 빠졌다.

 

칠성이의 단소 소리는 점점 더 신이 나고 흥겨워져 갔다. 그는 단소를 계속 불었다. 우리는

신나게 춤을 추느라 아버지와 칠성이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사랑채로 통하는 계단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계셨다는 것도 몰랐다.

아버지는 내가 춤추는 것을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할머니가 우리에게 밤마다 춤을 가르쳐 주시던 때에도 한 번도 들어와 보신 적이 없었다.

 

71쪽 두 누나들은 작은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애들이 부르는 노래를 불렀고, 우리는 아무렇게나 손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러나 누나들이 우리 앞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은은한 노래를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72쪽 그것은 소위 말하는 '탈춤'에서 따온 곡이었다.

 

<<<-이미륵 씨의 우리 것에 대한 경험과 그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요즘에야 사물놀이나 국악 같은 것에 귀를 기울이고 판소리가

이태리의 어떤 노래에 못지 않은 세계적인 무형문화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 어둔 역사와 서양화에 매진해 나갈 그 시기에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우리 것에 대한 사랑과 몸에 배인 그 풍류를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저자는 이런 점에서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은 이 분이 억지로 만들어내는 무슨 국수주의 때문이 아니고

자신의 삶과 문화에 대한 애착과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온 것이기에

자긍심으로 우러나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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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2)

 

보통 책읽기의 순서를 거꾸로 하권을 읽고 상권을 읽게 되었다.

학교 도서실에 가서 빌린 후, 이틀만에 다 읽게 되었다.

 

저자의 어른 시절에 대해서 비록 작품을 통해서이지만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특별히 조선말의 그 혼탁한 시기에 양반 지주 가정의

일상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녀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 깊은 인상을 지우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한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과 그것이

단순한 암기 교육이 아니라 아동들이 발전단계에 따라서 엄격하지만 흥미롭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책 내용 중에 그런 부분을 몇 군데 적시해 본다.

 

23쪽 매일 아침 수암은 아버지한테서 새로운 한자 넉 자씩을 배웠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서, 그가 아버지한테서 풀려 날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에는 한 자 한 자씪 배우고, 나중에는 넉 자를 모두 합해서 뜻과 그 음을 따라 외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나도 곧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24쪽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내게 새 책 한 권을 주시면서

"이 책을 열심히 보도록 해라. 이제부터 너도 배워여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책은 누런 표지에 파란 실로 꿰맨, 수암의 책과 똑같은 것이었다. 나는 책장을 폈고,

아버지는 나에게 첫 줄 네 글자를 가르쳐 주셨다. 매우 엄숙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온 몸이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후 얼마 있다가 우리는 붓글씨를 배우게 되었는데, 읽는 공부보다 훨씬 즐거웠다.

우리는 각자 벼룻집과 여러 장의 습자지를 받았고, 먹 가는 법부터 배웠다. 벼루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물을 아주 조금 따라 붓고, 먹으로 물이 기름처럼 진해질 때까지

오랫동안 앞뒤로 갈았다.

그 다음, 우리는 큰 붓으로 습자책에 따라 한 획 한 획씩 썼다. 습자 연습을 하는 데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우리가 처음 쓴 글자는 하늘 천 자였는데, 이 한 자를 적어도

백 번이상 썼다. 우리는 청소부가 총채를 쥐듯이 붓을 단단히 잡고, 엷은 종이에다가

위에서 아래까지 하나 가득 차도록 마구 썼다. 손가락이 온톧 먹물투성이가 되었다.

 

27쪽 그 다음에는 우리가 배운 천자문의 순서대로 검을 현 자와 누루 황 자를 써 나갔다.

우리는 방에 있는 깨끗한 돗자리를 더렵혀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항상 안채의 마루에서

글을 썼다. 그러나 우리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날 일, 달 월, 별 성, 별 신

자를 썼다.

 

36쪽 이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쉬지 않고 한문책을 익혔다. 그 책의 표지에는

'천자문'이라고 쓰여 있었다. 꼭 천 자가 적혀 있는 이 책 속에는 한 줄에 넉 자씩이

서로 운을 맺고 있었다. 이 책은 본래의 제목 외에도 부제로 '백수문'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이 책을 끝까지 다 배우고 난 다음에야, 이 책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이 책의 저자는 죄수였는데, 그는 젊은 나이에 중국 황제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아끼던 모든 백성들이 그를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황제는 그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를 내주면서, 이걸 풀기만 하면

살려 주겠노라고 했다. 그 어려운 과제는 아무렇게나 모아 놓은 천 개의 글자를 가지고

37쪽 하룻밤 사이에 훌륭한 시를 짓는 일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그 젊은 시인은 성공적으로

과제를 풀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그가 시를 가지고 황제 앞에 나타났을 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그 하룻밤 사이에 그는 과제에 매달려 백발노인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 조용히 앉아서 이야기를 아주 감동 깊게 들었다.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

렀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죽음과의 투쟁에서 그의 머리가 완전히 하얗게 백발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슬프게 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훈장님 한 분을 모셔다가 바깥채에 서당을 차리셨다. 아버지와

친한 집안의 아이들까지 이 서당에 다니게 되면서 우리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우리는 이 때부터 매일 아침 낯선 훈장 선생님한테 가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우리는 이 새로운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39쪽 왜냐하면 저녁 때까지 가만히 앉아 꼼짝도 못 하고 글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쉬는 시간이 되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은 매우 재미있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놀이를 많이 가르쳐 주었다.

40쪽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놀이는 '제기차기'였다. 제기는 배드민턴

공과 비슷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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