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대학에 가다
제임스 사이어/ 김성현 옮김. IVP.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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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이렇게 정리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1998년에 발행된 책이고 세계관적 사고에 의해서 정리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학생들, 젊은이들이 이런 정도의 생각은 충분히 하리라 생각되어 정리가 되면 누군가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책으로 보면 좋겠지만 이 시대에 정리된 자료가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서 이렇게 블로그에 정리해본다.
먼저는 나의 생각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는 뜻이 있고 나아가
누구든지 이 내용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참된 삶을 살아가는 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으시기 바란다]
2012년 이 시대에 볼 때 젊은이들이 이런 내용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다.
너무 성숙한 젊은이들, 삶을 놀이같이 살아가는 이들,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고뇌하는 젊은이들
편리한 IT 기기들에 의해서 그냥 개인의 게토에서 혼자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참으로 안타갑다.
내가 편한데 무슨 고민을 사서 하시는가? 고 오히려 반문을 할지 모르겠으나
과연 진리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그리고 거기서 반듯이 얻어야 하는 구원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서는
인생에 해답이 없음을 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과
그 큰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란다.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정리하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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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열린 지성, 한쪽은 닫자.
71쪽 상대주의처럼 만연한 지적·사회적 세력을 탐구하는 일은 언제나 긴 과정이다.
상대주의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앞에서 그 중 세 가지를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 세 가지를 더 볼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제한적으로 수용된다면 장점이 있다. 나머지 둘은 급진적인 회의주의나 무신론을 받아들여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는 배치되는 전제들을 가진다.
적어도 제한적이나마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질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는 것도 볼 것이다.
4. 어떤 종교적, 지적 신념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수정 가능하다.
72쪽 이 주장은 '부드러운' 형태로 취하면 부분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유한한 인간들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체계들은, 상식이든, 철학이든 신학이든,
언제가 수정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충고를 따르면 인간은 훨씬 나은 처지에 놓일 것이다.
"언제나 교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신념에 대해 열린 지성(mind)을 가지라"
그러나 또한 우리의 확신에 대한 용기도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런 주저없이 신념을 붙들어서 어느 단계까지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도록 방해받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73쪽 그러나 "어떤 종교적 신념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어떤 경우에든 수정 가능하다"고 말하는 흔한 상대주의는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강한' 형태로 이 주장을 취하면 이는 급진적인 회의주의 즉, 어떤 것도 옳다고 확신하며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부정이 된다.
진리는 우리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주장을 전혀 뒷받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한 형태로 표현될 경우 이 입장은 자기 모순에 빠진다. 만약 모든 것이 수정 가능하다면, 이 주장도 수정 가능해야한다.
철저한 회의주의(허무주의)는 너무 많은 것을 주장한다.
사람은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알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없다.
단지 회의론자로 남고 싶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만 주장하고 어쩌면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철저한 허무주의자가 되고, 허무주의는(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스스로에 대한 일관성을 잃는다.
전통적 인식론을 보자.
전통적 인식론이 가정하는 바는,
우리의 지식이 다양한 사물에 대한 진리에 접근하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것들 중 어떤 것은 다른 것들보다 실재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주장이 정당화되려면 자신과 타인들의 과거 및 현재의 경험, 내면의 논리적인 일관성 그리고 권위 있는 문헌들
-과학 문헌이든 종교 문헌이든-에 드러난 것들과의 일치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문헌에 대한 믿음 자체도 그 문헌의 내용이 이성과 경험의 시험을
얼마나 잘 통과하는가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 이성이나 경험이 진리의 최종 결정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최종 결정자는 하나님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리의 최종 결정자라는 믿음은 이성과 경험에 호소하여 정당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74쪽 예를 들어,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이 죄 지은 백성에게 준 계시라는 믿음은 아주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한다.
이 신앙은 보편적 의도(universal intent)에서 신봉된다. 이것은 '내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참된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이는 공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며 공적인 탐문과 토의를 거쳐야 한다. 특히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이는 모든 나라에게, 무슨 인종, 신조나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 집단에게 알려져야 한다. 이것은 공적인 진리다.
우리는 이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면서 그들 마음 속에 성령이 증거하셔서 그들 스스로도 이를 진리로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 의도'를 가지고 우리 신앙을 지킨다면, 우리의 실패 가능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진리를 알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미묘한 균형이다 - 명백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그에 반해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만 사물을 바라보고자 하는 경향 사이에서 잡아야 하는 균형.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처한 위치이다 - 타락한 백성, 구속되었으나 아직 영광 가운데 완성되지 않은.
( Lesslie Newbgin,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Grand Rapids. Mich. : Eerdmans, 1989- , p. 50)
5. 모든 주장은 언어의 구조 내에서 이루어진다. 그 주장들은 언어의 구조와
거기 깔려 있는 전제들에 얼마나 들어맞는지에 따라 진리로 결정된다.
75쪽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에서는 우리가 주로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가정한다.
그렇지 않다고 믿으려면, 정말 힘들게 오래도록 생각해야 한다.
주로 장자같은 현인이나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의 독려에 접해서야 그런 시도를 해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상대주의는 아직은 주로 학문적인 철학, 사회학과 인문학의 세계에 국한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중 한 가지, 리처드 로티의 철학에 나타나는 형태만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본질적으로 이런 종류의 상대주의는 현실 속에 알 수 있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대신 우리의 외부에는 우리가 합리적인 지성이나 감각으로 접하는 본질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감각은 현상(phenomena)을 포착(apprehend)하지만, 이 현상은 우리가 포착하는 대상의 본질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
더욱이, 이 현상들 자체도 엄격하게 나누어진 범주가 아니다.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나무라는 것은 항상 유동하는 다수적(multiple) 현상에 붙인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상과 함께 이름도 비본질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를 만들어 서로에게 실제적으로 접근하며 우리 외부의 환경을 제어할 힘을 가진다.
(Richard Rorty, "Introduction: Pragmatism and Philosophy", in the Consequences of Pragmatism
-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pp. xii-xlvii 참고)
정말, 우리에게는 많은 언어가 있다. 이 중 어떤 것들, 불어, 영어나 한국어 같은 것들은 우리를 국가나 민족 단위로 나누어준다.
다른 것들, 물리학이나 화학의 언어 같은 것들은 우리가 물리 세계라고 부르는 문제들에 적용된다.
또 다른 언어들은 윤리적 관심에, 또 어떤 언어들은 종교적 문제, 즉 우리가 궁금한 것, 신, 영, 신성, 혼, 영생 등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에 적용된다.
76쪽 로티를 강하게 비판하는 Charles Taylor는 이렇게 말한다.
"로티는 비현실주의로의 커다란 도약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사물의 사실이나 진리라고 생각되던 것들이 있던 곳에,
실은 단지 경쟁하는 여러 언어들만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언어들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다툴 수 밖에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이들보다는 우리에게 더 잘 맞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철학자들 중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비유신론자이거나 무신론자이다. 우주와 우리를 창조한 신이,
혹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명하거나 우리의 의사 소통에 개입해 있는 그러한 신이 '저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각 언어는 대개 자기- 충족적이어서 여러 언어 중 하나를 합리적으로 선택할 방법이 없다.
각각은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고, 진리에 대한 주장에 판결을 내리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소용되는' 것이면 된다.
만약 "창문 좀 열어 주십시오"라고 소리질러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말은 원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아트만이 브라만이다"라는 힌두교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힌두교의 언어 체계의 구조 속에 있을 때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언어 체계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라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비난이나 문책을 받을 수 없다.
두 언어는 모두 현상에 형태를 준다. 둘 중 어느 것도 언어 그 자체 뒤에 숨은 무언가와는 우리를 연결시켜 주지 않는다.
두 언어는 모두 인간의 창조물이다. 실체적이거나 초월적인 어떤 본질에서도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77쪽 이런 문맥에서 우리는 리처드 로티를 이해하게 된다.
"세계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만 말할 뿐이다. 우리가 일단 언어로 무장하면, 세계는 우리에게 신념을 준다.
그러나 언어를 주지는 못한다. 인간들만이 그럴 수 있다.
언어는 발견되기 보다는 만들어지며... 진리는 언어학적 개체들, 즉 문장들이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니체의 표현으로 '은유들의 기동 부대'가 되는 것이다. 과학조차도 특별한 위치가 없다.
과학은 단지 "문학의 한 장르-혹은 거꾸로 표현하자면 문학이나 예술도 과학적 탐구와 똑같은 기반을 갖춘 탐구이다."
윤리학은 "과학 이론보다 더 '상대적'이지도 더 '주관적'이지도 않다."
이런 개념이 종교적 주장이나 어떤 가치에 관한 주장에 적용되었을 때 급진적 상대주의를 점화시킨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종교가 같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앞에서 논했던 견해), 각 종교가 각각의 언어로 각각의 주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 종교는 다른 사람이 그 언어로 말하도록 설득시키는 방법으로만 추종자를 얻을 수 있다.
객관적 진리는 아무 상관도 없다. 객관적 진리란 어차피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자유롭다고 그리고 미래에 장차 무엇이 될지를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가정한다면,
내가 죽은 후에 동지들이 과연 내 작업을 최대의 완성도까지 끌고 가 줄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다. 내가 죽은 후 미래에
어떤 사람이 파시즘을 일으키기로 결정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 겁쟁이들이 되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인간의 현실이 될 것이고, 인간에게는 참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인간 스스로가 결정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Jean-Paul Sarte, Existentialism -New York:Philosophical Library, 1947- pp. 36-37)
78쪽 로티는 자신이 상대주의자라는 것을 부인한다.
합의에 도달하여 어떤 입장이 진리라고 '정당화'되더라도, 상대주의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79쪽 정당화라는 말에는 언제나 단서가 따른다. 정당화의 보편적 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특정 언어 체계 안에서 맞는 것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각 언어 체계가 자신의 정당한 체계를 제시한다는 주장 자체도 그 언어 체계안에서만 진리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언어 체계와 다른 언어 체계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는 일종의 무한회귀에 직면한다.
예를 들어 로티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그와 동의하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인간 지성의 실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 신념에 이미 동의한 사람에게만, 그의 말이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실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 자체도 진리 아니면 허구이고, 옳거나 그른 것 중 분명 하나일 것이다.
로티는 자신의 견해가 옳으냐를 논의하는 것을 일관되게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공적인 담론의 영역에 내어놓아
이것이 수용되는지 아닌지만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철학에서는 그것이 견해를 정당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는 회피할 수 없다. 로티는 옳은가? 로티 조차도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현실이 정말로 실체를 가진 것이라면, 그것이 정말 우리 지성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우리 지성으로 접근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언어학적 상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들은 허구일 뿐이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출발점 자체를 부인해야 한다고 믿는다.
언어를 접근 가능한 실재의 주된 요소로 보는 생각에 바탕을 둔 상대주의는 '로고스 Logos'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진정한 실재이며 합리성(로고스)이라는 특징을 갖는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실재의 모든 차원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있다.
80쪽 이 신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였다면,
사람에게도 실재에 대한 적어도 부분적인 지식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상대주의의 마지막 형태를 살펴보자.
이 상대주의의 주장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표방하는 상대주의는 사실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6.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주의는 진리이다. 종교적 주장은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은유에 불과하다.
조화로만 인도한다면 어떤 은유이든 좋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죽음 후의 삶이란 없다.
제한적 상대주의라는 이 마지막 형태는 필자가 보기에는 대부분의 세속적 문화 인류학과 종교 사회학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회학자들과 문화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연구에 임할 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존재하는 것은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뿐이다.
모든 사회는 나름대로의 신화가 있고, 신앙과 실천 유형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문자적으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체성과 목적의식을 주는 사회적 응집력을 제공한다.
조셉 켐벨이 말하는 대로, "일부다처제에 대한 신화를 가져도 좋고 일부일처제에 대한 신화를 가져도 좋다.
어느 것이나 괜찮다. 당신이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종족,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종교는 그 문화에서, 그 문화를 위해서는 진리인 것이다.
81쪽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사람들의 신념을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좋지 않게 본다. 모든 이들(모든 개인 또는 사회)은 자신의
우주관을 가질 자격이 있다. 우리는 그저 내버려두어야 한다. 사람들의 사고를 바꾸는 것은 한 종족, 사회 또는 문화에 부조화를 가져다 준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한 개인의 회심이 결코 우연적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직 성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과연 우주적인 과업이다. 어떻게 그 울타리를 - 그 견고한 어둠의 그늘을 넘어서 빛의 세계로 올 수 있겠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죽은 사람을 살려서 새로운 인류로 창조하시는 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한 일이 없다.
그런 일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거나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병을 고치거나 그런 정도의 일이 아니라
과연 전능하신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
그렇다 과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 그에게서 가능한 일로 나타난 것이다. )
물론 이 입장에는 심각한 허점이 있다.
첫째, 이는 자기 모순적이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라면, 많은 종교는 단순히 허구이며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상 속에 사는 사람들을 그대로 버려두는 것은 엘리트주의적일 뿐 아니라 잔인한 것이다.
둘째, 어떤 종교는 실체 만물의 이치를 설명하는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배타적으로 진리임을 주장한다.
그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의 신앙이 진리가 아니며 단지 사회에 사회적 응집력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려고 애쓸 것이며, 자기들을 둘러싼 다원주의 문화 내에서 자신들을 상대화하고 주변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형태의 상대주의는 그 상대주의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종교나 사회를 다룰 수 없다.
셋째, 이런 형태의 상대주의가 내놓는 주장은 참이거나 거짓이다.
그런 상대주의는 은유도 아니고, 자신을 은유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단지 그것을, 그에 대한 반대 의견과 섞어 놓고 단순하게 그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해 버릴 수는 없다.
로고스 : 상대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
82쪽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충분히 촘촘한 그물을 가지고 있어서 진리라는 고기가 지나갈 때 붙잡을 수 있는 그런 지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정말 그런 지성을 소유한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는가?
[지성의 제자도 Discipleship of Mind. 한국 IVP]를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위의 책에서 다룬 것 중에 하나님의 로고스 되심(요 1:18)이 가진 의미에 대해 말했던 것을 요약한다.
인간 지식에 대한 우리 신뢰의 근거가 되는
첫 번째 생각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에 궁극적인 근거가 있다. 하나님은 실제로 거기 계신다.
그분은 무한하고, 인격적이며, 선하고, 전지(지성적), 전능, 무소부재하시다.
둘째, 하나님은 로고스이다. 그러므로 이성도 궁극적 근거를 가진다.
요 1:1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만약 하나님이 로고스(이성, 지성, 지혜) 자체라면, 적어도 한 인격적인 존재가 모든 것을 완전히 알고 있다.
바로 그것이 요한이 하나님에 대하여 선포하는 내용이다.
셋째, 로고스는 육체가 되었다. 하나님의 왕국은 가까이 왔다.
이 말은 궁극적 근거이신 하나님이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모순 없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다.
완전한 지혜와 지성이 인간의 형체속에 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말 인간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의 중요한 보증이다.
83쪽
넷째, 로고스는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주도 하나님 자신의 합리성의 흔적을 가진다.
"만물이 그(로고스)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 1:1)
이는 우주 안의 만물이 지성과 이성이신 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로고스의 의도를 실현함에 있어 세계는 객관적인 목적성을 지니며
첫째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이들에게 인식될 수있다.
다섯째, 로고스는 인간들의 빛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즉,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알 수 있게 하셨다. 더욱이, 로고스는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하나님 및 세상과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궁극적 가치에 대해 구체적인 안내를 해주셨다.
그것은 로고스가 육체가 된 이전에도 이후에도 진리이다.
하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가장 완전하게 말씀하셨다.(히 1:1-2)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대하여 기독교적 대안을 세울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뚜껑 열린 지성에 도전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상대주의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할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쏟아질 정도로 열려 있는 지성을 닫을 근거를 가졌다.
우리는 세상의 상대주의자들에게 우리 외부에 도덕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붙드는 것에 대해 확고한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학자일 수 있다. 이원성이란 없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열린 지성의 목적은 진리에 대해 열려 있다가 그것을 발견하면 닫는 것이다.
사고하는 것은 진리를 발견하고, 아무리 오류가 유혹해도 발견한 진리로부터 요동하지 않는 데서 그 가치를 얻는다.
우리는 한쪽은 막힌 지성을 원한다. 진리가 들어오면 흘러나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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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히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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