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대학에 가다. 제임스 사이어. 김성현 옮김. IVP. 1998
-대학 사회에서 직면하는 개인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의 도전
제2장 현대성의 소용돌이
22쪽 현대성의 네 가지 세력.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우리가 최초로 가지게 된 신념들은 최초의 환경, 즉 주로 부모의 신념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으로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사회적·심리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는 자신을 알기 시작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그 때부터 조금씩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의식적으로 생각할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의 뿌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될지를 철저히 주관하는 자율적인 존재는 절대로 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어느 정도의 자기 정체성과 자율성을 가진 이후에도 영향을 준 몇 가지 세력이 있다.
사회학자들은 이 복합적인 세력들을 현대성(modernity), 즉 현대 사회의 조건이라고 일컫는다.
개인주의
23쪽
개인주의는 현대성의 뿌리에 있다.
"나는 나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고 의존해서도 안된다. 결국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고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개인주의는 주로 서구적인 현상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개인주의가 근대적인 형태로, 비록 최초는 아니더라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마틴 루터가 교회의 위계 질서를 거부한
사건을 통해서였다.
"성경과 분명한 이성을 근거로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내 생각을 바꿀 수 없다." 개인의 양심은 강요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미국의 개인주의 현상의 뿌리가 된 존 로크, 벤자민 프랭클린과 윌트 휘트먼 같은 이들의 영향
에를 들어, 존 로크 같은 경우는 개인을 근본적인 실재(fundamental reality)라고 보았다.
사회는 이차적이다.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분이 아니다.
나는 내 물질적 소유와 내 사회적 권력과 내게 주어진 명예를 가지고 내 성공을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온갖 제약들과 온갖 전통들에 대항하여 나 자신을 표현할 것이다. "나는 나여야만 해"
다원주의
24쪽 다원주의는 다지선다형 삶의 방식이다. 개인주의가 키를 잡고 지배하는 사회에서,
온통 뒤섞인 가치관으로 가득 채워진 보따리 외에 무엇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다원주의는 사실상 우리 세계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그럭저럭 통일되어 있던 중세의 기독교 세계관에 다양한 종류의 반항적 기독교 신앙들이 점차 추가되어 있다.
독일의 루터주의, 제네바의 칼빈주의, 재침례파의 분리주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개신교의 다양성에 몽테뉴 같은 지식인들의 회의주의와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에 대한 칭송이 부가되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점점 파괴되어 갔고, 자연주의가 득세하였으며,
기독교는 사회의 문화적 규범을 형성하는 일에서 점점 자리를 잃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인도, 일본과 중국의 철학 및 종교가 널리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이 이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서양 세계에도 동양 사상이 침투하였다.
20세기 중반에는 서양의 나라들마다 대표적인 인물이나 종교 집단을 확보하지 않은 철학 사조나 종교 분파가
하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문화 전체를 놓고 볼 때 어느 종교도 두드러지게 우세하지는 않다. 어떤 하나도 결정적인 권위를 가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잘 나가고 있다. 그 중 어느 것이 진리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사회적 관례를 깨는 것이다.
(그러나 물밑의 쟁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표리가 부동하다. 겉으로는 악수를 하지만 속으로는 다양한 모양의
경쟁을 하고 있다. 그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더 살펴보아야 한다.)
상대주의
25쪽 다수의 대안들에 직면한 우리의 세계는 각 종교의 종교적·철학적 관점들의 진리 여부에 대해 질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회적인 평화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너한테는 그게 진리일거야. 좋아. 하지만 나한테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어."
종교 과목 시간이나 기숙사에서, 종교적인 선언들은
- 역사적 이든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 일 만에 살아나셨다.")
혹은 신학적이든("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시키셨다.")-
신념(beliefs)이라고 여겨졌지, 진리(truth)에 대한 주장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참도 거짓도 아니었다.
26쪽 윤리적 가치관도 마찬가지로 취급되었다.
"네가 낙태가 옳지 않다고 믿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내가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괜찮다."
물론, 아직도 많은 세속적 인본주의자와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많은 이슬람교인이 진리에 대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성이 움직이는 방향과는 동떨어져 있다. 다원주의적으로 섞인 그 푸딩 자체에 결정적인 맛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생활화
이것은 사회적인 현실을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놓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두 영역이란 바로 공(public)과 사(private)이다.
공적인 영역에는 정부, 정치, 기업, 경제,생산, 기술, 과학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이 영역은 사실(fact)에 의해 지배된다. 물론 사실이란 것은 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어 이성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의 기준으로 증명할 수 있으면, 그것은 진리 즉 사실이다.
이것이 공적인 영역의 질서 정연한 세계이다. 여기에는 별로 변동의 여지가 없다. 기업 세계가 누구를 고용할지를
결정할 때 만약 당신이 거기에 들어맞으면 고용되는 것이고, 아니면 직장을 잃는 것이다.
사적인 영역에는 종교, 도덕, 여가, 소비의 문제들이 있다.
당신은 어떤 특정 교리를 믿거나, 특정 교회에 출석하거나, 특정 스포츠 행상에 가거나, 특정한 상품을 사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여기에는 엄청난 '개인적인 자유'가 있다.
27쪽 얼마나 자유가 많으냐 하면, 한 사람의 생각과 선호도는 단지 선택의 문제이고 어쩌면 단지 '취향'의 문제라고
여겨질 정도다. 사실 여부는 관계가 없다.
신념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공적으로 따져 볼 수 없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믿어도 좋다. 옳거나 그르다는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의 것들은 세속 대학에 다니는 기독학생들에게 힘을 뻗치고 있는 사회 세력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여기에다가 직업화, 관료화, 전문화, 기술화 등을 추가할 수 있다.
이런 것들에다 세계관이 유신론에서 자연주의, 범신론과 다양한 뉴 에이지 사상들로 옮겨 간 것을 보태면,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주의
사상에는 결과가 따른다. 사상은 삶을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것이다.
28쪽 칼 세이건(Carl Sagan)은
"우리가 보는 우주만이 지금 있는 것, 혹은 과거에 있던 것, 혹은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자연주의를 가장 간략하게 정의한 것이다.
자연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있는 것이며 자연주의적 설명만이 진정한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신비는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우주의 작은 구석에 있는 작고도 별것 아닌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들 가운데
하나의 종으로서 진화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by 철학자 제임스 레이첼스(James Rechels)
이런 생각이 종교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의 주요 이론과 활동들에 깔려 있다.
자연 과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이, 유능한 동료들이 인정한 사실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인문 과학자들도 이런 과학의 절차를 모방하려고 애쓰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그들끼리도
상당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어떤 인문 과학자는 훨씬 불안정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이론을 세우며 그 결과에 대해 엄청난 회의를 가지고 있다.
철학을 제외한 다른 인문학 분야에서는 단지 개념의 유형들을 보기 좋게 정돈하고, 자신들이 다루는 주제의 미학적인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수많은 형상, 이야기, 개념, 모습과 소리들의 현란함 속에서 환희를 느낄 뿐이다.
폴 드 만(Paul de Man)이나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같은 이들은 지성의 혼 자체를 영리하게도
-의미를 이해하기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를- 해체한다.
29쪽 철학만이 이런 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진리인가? 선한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몇몇 자연주의 철학자들은 아직 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학자들 중에도 진리의 추구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사회란
"왜곡되지 않은 의사 소통의 결과면 그게 무엇이든 '진리' (혹은 '옳은 것', 혹은 '정당한 것')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면 어떤 견해든지 통용되는 그런 사회"라고 믿는다.
로티는 결국 과학자나 철학자보다는 시인들을 추켜세우고 마는데, 이는 시인들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전율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그대가 미래의 세대들에게 기억되기 원한다면 수학보다는 시(詩)에 입문하라.
그대의 저서가 가죽 표지에 경이롭게 묻혀있기보다 읽히기를 원한다면, 진리보다는 짜릿한 것들을 쓰도록 노력하라.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널리 수용되는 진리들-은 하이데거와 나보코프(Nabokov)가 생각했듯이
죽은 은유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진리란 감각을 자극할-즉 짜릿함을 불러일으키는-능력이, 익숙해져 버리거나 오래 사용해서 무뎌지고 난 후 남아있는
뼈다귀들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신앙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들은 쉽게 굴복하고 자연주의가 되었다.
새로운 영성들
30쪽
다른 이들은 자연주의적 사고로의 전이를 수용하기보다는 그것을 뛰어넘어 뉴 에이지 사고 방식으로 넘어갔다.
뉴 에이지(Nes age) 사상에서는, 각 사람의 자아를 실재의 중심으로 본다.
모든 실재에는 영이 스며들어 있고,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영은 자아이다.
서구의 유명 인사들 중에는 Shirley MacLaine(셜리 매클레인)과 John Denver(존 덴버) 같은 이들이 뉴 에이지에 속한다.
영적인 지도자들 가운데는, 초월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줄여서 TM)을 주도한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Maharish Mahesh Yogi)가 있다.
뉴 에이지가 체험을 중시하고 지성적인 것은 무엇이든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대학 캠퍼스에서까지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다.
캠퍼스에 나타나는 뉴 에이지 사상의 두드러진 예는 신학자들 사이에서조차 발견된다. 토머스 오덴(Thomas C. Oden)은
전통적인 기독교를 제쳐놓고, 영적인 실재를 찾아 길고도 험난한 탐색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31쪽
오덴은 사실 자신을 '운동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여러 운동을 좇아다닌 그는 우선 열심히 그것을 배우고 자신을 그 속에 쏟아붓고 기독교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어 보이면
그것들에 세례를 주고는 다른 운동을 찾아 나섰다."
(*오덴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러 가지 '운동'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를 풍미했던 다양한 사회적인 현상들로서,
대부분 뉴 에이지 운동과 느슨하게나마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 연관은 가장 멀게는 개인 및 개인의 잠재력을 중시하는 사상
-여러 가지 인권 운동들 및 실존주의-으로부터 잠재력 개발을 통한 전인화를 꾀하는 노력(심리치료 기법들) 그리고
결국은 주술이나 초능력과 관련된 데까지 이어진다.)
32쪽 로우 : 웨이드 재판(Roe vs Wade) 이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1973년 미 대법원 판결로서 여성의 사생활권을 존중하며 임신 3개월 이내에는 제한없이 낙태를 요청할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함.
공교롭게도 이 재판을 제기했던 여성은 최근에 낙태반대론자 진영에 가담하였음.)
"무엇보다도 낙태 권리 운동 때문에 나는 운동이란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오덴은 일종의 회심을 경험하였고 그의 신앙의 뿌리인 성경과 교회사 초기 천 년 간의 성경 해석들로 돌아갔다.
그는 이제 정통으로 돌아왔고, 문화와 사상의 역사를 알며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진실성에 대해 강한 입장을
취하는 '탈비평(postcritecal) 신학'을 부르짖고 있다.
토머스 오덴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남았다.
< 그러면 대부분의 기독대학생들은 대학 생활을 거치는 동안에 어떻게 되는가?
또 신앙을 가지지 않고 대학에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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