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쪽

피아제의 견해에 의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적 발달'은 '구조'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그러니 자아의 발달을 규정하려면 우리는 자아의 '구조'가 발달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즉, 우리는 자아가 개인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는가 하는 것 이상으로 자아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뜻에서의 자아의 발달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사람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아다. 그러나 자아는 무엇인가? 사람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성의 종합, 한 마디로 하나의 종합니다. 종합은 두 요소 사이의 관계이다. .....’

321쪽

자아의 구조를 알아내는 데에 필요한 정도로 생각해본다.

‘사람’과 ‘자아’는 둘 다 ‘관계’이지만, ‘사람’은 ‘종합’이며 ‘否定的 제 3요소’이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부정적 제3요소’로서, 그것은 ‘사람’이다. 또한, 사람은 ‘무한과 유한의 종합, 시간과 영원의 종합, 자유와 필연서의 종합’으로서, 이 종합은 아직 자아가 아니다.

여기서 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되어 있는 실체이며, 유한과 무한의 종합 등등이 하나의 ‘종합’으로서, 다시 말하면 고정된 실체로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아직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 남아 있는 한, 종합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할 부정적 요소로 남아 있는 것이며, 이것은 유한과 무한의 관계 등등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것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대체로 말하자면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된 자아는(즉,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이것은 개념상의 구분이다. 실제로 이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논의를 위한 구분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계속 진행하자. 독서를 위해서) 그 내부에 그것이 관계를 맺어야 할 또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아는 이 두 자아 사이의 관계(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아의 내부에 들어 있는 두개의 요소를 키.는 [현실성]과 [가능성]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키.에 의하면, 자아의 구조는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


테일러는 키.의 자아의 구조를 규정하여, ‘자아는 현실성과 가능성이 결단의 순간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한다.

(Mark C. Taylor, Kierkegaard's Pseudonymous Authorship: A Study of Time and the Self, Princeton Univ. Press, 1975, p283.)

만약 현실성과 가능성이 자아의 구조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요소라면, 이 두 개의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는 ‘사람’이라고는 부를 수 있을지언정, ‘자아’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322쪽 테일러는 키.의 자아관을 역사적으로 대두된 다른 두 가지 자아관과 대비시키고 있다. 1) ‘實體로서의 자아’, 2) '過程으로서의 자아‘(헤겔)이며, 키.의 자아관을 테일러는

3) ’關係로서의 자아‘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실체로서의 자아와 관계로서의 자아의 대비에 있다. 실체로서의 자아는 ‘기능으로서의 자아’와 통하고, 관계로서의 자아는 ‘구조로서의 자아’와 통한다.


1. 자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취된다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테일러의 용어로, ‘현실성과 가능성의 결단에 의한 관계’(‘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는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고 개인이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자아심리학에서의 ‘관계’는 자아와 타인의 관계일 뿐이며, 자아는 그 관계를 맺는 실체로 파악된다. 그러나 키.의 관계는 자아의 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는 구성요소들 사이의 관계이며, 따라서 관계 그 자체가 자아의 개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 자아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의 성취와는 달리, 키.의 자아관에 나타내는 자아의 성취는 개인의 심각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진정한 성취이며, 그 성취는 또한 단계를 따라 점점 도달하기 어려운 것으로 되어 있다.

323족

<키.의 자아의 발달단계>

자아라는 것이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세 단계를 지배하는 논리는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이 점차적으로 날카로와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1) 審美的 단계는 아직 자아가 생기지 않은 단계이다.-이때 가능성은 현실성의 단순한 연장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주어진 것은 오직 영혼과 육체의 실체, 키.의 용어로 ‘否定的 제3요소’라고 한 것, 아직 관계 속에 들어오지 않은 불완전한 자아이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이 단계에서 자아는 ‘즉각적인 현재’이외의 하등 다른 기준을 가지지 못한다.

(로저스는 ‘충만하게 기능하는 사람’을 기술하면서, 그는 ‘즉각적인 현재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로저스가 보기에 자아가 발달한 상태는 키.에 있어서는 아직 자아가 생기지도 않은 상태이다.-도예베르트가 말하는 ‘순진경험’의 세계와 통하는 것 같다.)

심지적 단계에서의 자아가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긴장을 일으킬만한 두 개의 극이 없는 것이다. 단순히 부평초처럼 떠다니면서 순간순간의 ‘개인적 경험을 심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은 윤리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에서 나타난다.

324쪽

2) 윤리적 단계에서 현실성과 긴장 관계에 있는 ‘가능성’은 인간 세상의 윤리적 규범이다.

윤리적 규범은 심미적 단계에서의 자아, 즉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서의 실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선택’을 필요로 한다.

-윤리적 단계에서의 가능성인 이 윤리적 규범은 결코 심미적 단계에서와 같은 자아의 연장이라고는 볼 수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현실성과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고, 그 거리로 말미암아 현실성과 가능성 사이에는 긴장이 생기는 것이다.

고무줄처럼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이 가장 날카로와지는 것은 현실성과 가능성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즉 심미적 단계에서와 같이 가능성이 현실성의 연장인 상태와는 정반대되는 상태에서일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 단계이다.


3) 종교적 단계에서의 가능성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의 경지, 또는 ‘神

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 세계의 윤리적 규범을 따라서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윤리적 단계에서의 가능성은, 비록 심미적 단계에서와 같은 의미에서의 현실성의 연장은 아니라 해도, 현실성으로부터 원칙상 도달가능한 범위에 있다는 뜻에서 여전히 현실성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단계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가능성이 현실성과 조금도 닮은 점이 없다. 키.의 용어로, ‘천길 낭떠러지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윤리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에서 자아의 현실성이 대면하고 있는 가능성은 각각 ‘世俗의 역사’와 ‘聖域의 역사’를 대표한다. 세속의 역사에서 준수되는 원리, 즉 인간 세계의 윤리와 성역의 역사에서 준수되는 원리, 즉 신의 뜻은 그 종류에 있어서 완전히 구분된다. 그리고 만약 윤리적 단계보다 종교적 단계가 자아발달에서 높은 단계를 보여 준다면, 세속의 역사는 聖域의 역사를 위한 ‘試補(시보) 기간’이라는 키.의 말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윤리적 단계에서 현실성과 가능성의 균형은 그 단계로서는 완전한 것 같지만, 종교적 단계와 비교해 보면 윤리적 단계에서의 가능성은 현실성 쪽으로 훨씬 치우쳐 있고, 따라서 새로운 균형이 요구되는 것이다.)

325쪽

이 세단계는 일회적, 직선적 발달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삶의 과정에서 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되어야 하지만, 거의 동일한 순간에 자아를 둘러싸고 있다.

키.는 ‘자아의 힘은 그 척도의 힘에 비례한다.’고 말하였다.(Taylor, 상계서, p.283) 여기서 ‘비례한다’는 말은 ‘의존한다’는 뜻을 그 속에 이미 포함하고 있다. 자아가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척도, 자아가 느끼는 긴장의 대상, 그것이 크고 힘있는 것일 때, 그리고 그 정도에 비례하여 자아도 크고 힘있는 것이 된다.  神이 참으로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자아는 종교적 단계에서 가장 크게, 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자아심리학의 자아관의 본질과 결함을 보여준다.

326쪽

자아심리학에서의 자아는 그 실체 이외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자아의 가능성을 실현(자아 실현)은 어디까지나 자아의 내부에 ‘잠재적인 형태’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적 기준 이외의 기준은 ‘진정한 자아’에 방해가 되는 것이며, 자아를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축소시킬 뿐이다. 자아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키,의 발달단계는 거꾸로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신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 사회의 다른 사람들, 특히 윤리적 규범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는 어른들의 말에 따라 사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되는 것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로저스가 ‘충만하게 기능하는 사람’을 기술하는 데에 사용한 ‘의미있다든가, 풍요하다든가, 흥분을 일으킨다든다, 보람을 안겨준다든가, 도전감을 자극한다는’ 등의 표현은 얼른 생각하기에도 키.가 말한 종교적 단계에서의 삶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로저스 ‘충만하게 기능하는 사람’의 모습 1, 현실적(억압하고 있는 경험을 모두 의식하고 수용하며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음), 2. 주체적(타인의 비판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판단을 하며 자립적으로 행동함), 3. 적극적(불안이 없고,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지향적인 생활의욕을 나타냄), 4. 사회적(타인과 자유롭게 개방적인 인간관계를 가리려 함), 5. 창조적(문제에 독자적으로 적응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C. Rogers, 'The Concept of the Fully Functioning Person,' Psychotherapy, 11(1963), pp. 7-26)

종교적 단계에서 자아가 대면하고 있는 가능성은 그러한 ‘충만한’ 느낌을 주는 대상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가장 비참한 죄인임을 느끼게 하는 그런 대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아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자아가 실현해야 할 기준이 심리적 실체로서의 자아 내부에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성취할 것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들린다.

327쪽

자아가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교육은 여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자아발달과 교육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교육이라는 말을 ‘교과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한정해서 말해보자.

가령 어떤 사람이 ‘교과 공부는 자아발달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고 하자. 이 말을 자아심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교과 공부가 ‘의식된 자아’를 고양하는 데에, 즉 긍정적 자아 개념을 길러주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도 괜찮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반면에, 키.식의 자아발달, 교과공부가 종교적 단계에 도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곧 교과 공부가 ‘나는 비참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는 뜻이 될 것이다. 동일한 교과 공부가 이렇게 이중의 양상을 가진다면,

328쪽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아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발달과 교과 공부는 오직 우연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자아심리학에서 볼 때 교과 공부는, 친구와 잡담을 하거나 원고를 쓰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일로, 자아가하는 여러 가지 기능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 교과 공부를 하는 동안에 ‘意識된 자아’가 고양되며(물론, 저하되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는 다시 교과공부라는 기능을 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안범희 역, W.W. 퍼어키, [자아발달과 교육], 문음사, 1985 )

그러나 키.의 자아발달에 있어서는 형편이 아주 다르다. 만약 교과 공부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일이라면, 교과 공부는 곧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일 그 자체이다. 교과 공부는 바로 종교에서의 신에 대한 교육적 대응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 교육학에서는, 아마 자아심리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개인이 그 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심리적 실체로서의 개인이 장차 나타내게 될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온 것 같다. 키.의 자아이론은 적어도 이 그릇된 연상을 시정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독후감 : 인간이 무엇인가? 자아가 무엇인가?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어떠한가?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자아의 발달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점등은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에세이다. 긍정적 자아개념이라고 하는 허구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상적인 자아발달, 즉 플라톤적인 이상론의 환상 역시 배제할 수 없는 글 솜씨이다. 현실성과 가능성, 사람은 분명 식물의 씨앗과 다르지만, 씨앗은 단계별로 가능태를 노출한다. 그 완성태는 씨앗 속에 있다고 할 때, 씨앗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발달의 열쇠를 말한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환경이라는 외부적 요소가 없이는 발현될 수 없다. 쾌적한 환경 속에서만 씨앗이 담고 있는 가능성을 100%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가능성은 무엇인가? 정자와 난자가 엄마 자궁에서 만나서 정착되어 핵분열로부터 하나의 생명 개체로서 성장 발달해 가는 과정에서 인간다움을 어디서 어떻게 획득하고 구현해 가는가? 과연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전제가 각각 다르다.  종교관에 따라서 그러하다. 다른 말로 하면 신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런대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것이 하나라고 자기들안에서 통일시킨다. 아무리 천만인이 소리쳐대도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로 변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어린 아이가 미약한 소리로 말하더라도 ‘진리’는 그 힘을 열매로서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삶을 매개로 한 교육이란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마치 우물 안에 갇혀있는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계에 대하여, 또는 동굴 속에 갇혀있는 원숭이가 동굴 밖의 만물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은 이 사유 세계의 개념들 속에서 희미한 빛처럼 보이는 것들이 이러하니, 광명의 진리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소경위에 소경이 되고 말지 않겠는가?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자이신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인격으로 의사소통하시는 하나님 천지의 대 주재이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한 어린 아이에게도 인생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고 알게 하시고 생명으로서 생명을 누리며 풍성하게 누리게 하신다. 자라가게 하신다. 사람이므로 분수를 알고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게 하신다. 신령한 찬미를!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싸잡아서 말하는 듯 하나 이 에세이의 진정성과 가치를 그만큼에서 누리고 그것을 사로잡아서 선을 이루는데 사용한다. 감사한 일이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빚진 일이다.)

 

4/28(금)

307쪽 우리 내부의 이상적 표준이 지식의 裏面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이상적 표준도 지식과 다름없이 바깥 현상에 의존한다는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적 표준은 지식이 현상에 의존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현상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적 표준은 현상에 바탕을 두고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지식탐구가 있기 이전에, 그 지식탐구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1)<이것은 피터즈가 지식의 가치를 설명한 방식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그는 그 글에서 마이너스적 의미를 충분히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가 교육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은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지식과 현상이 관계를 맺는 방식과는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만큼 현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내부의 이상적 표준과 지식, 또는 안의 道와 밖의 道가 表裏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밖의 道와 안의 道는 동일한 과정을 통하여 전달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자아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내적 표준은 세계의 인식을 위한 객관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통하여 전달된다는 것이다.

308쪽 우리가 교육을 안의 道, 즉 마이너스 쪽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교육을 우리의 자아와 관련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고 우리의 관심을 자아로 향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터즈가 그토록 치밀하게 또 집요하게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류의 공적 전통인 지식 탐구에 입문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있다고 보아야 할지 모르나, 그의 설명이 보다 더 완전한 것이 되려면, 지식 탐구가 자아로서의 우리의 삶의 자세에 영향을 미친다는 식으로 그 가치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자아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하지 않고는 자아를 실현한다든가 자아를 향상시킨다든가 하는 말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1. 마음속의 생각과 외적 결과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연결-교육은 적응의 수단


2. 지식과 그 대상, 또는 개념과 현상의 관계-교육은 성년식이다.

3. 표리와 표면의 관계, 마이너스와 플러스의 관계로 연결

(여기서 안은 둘째 단계에서의 지식이 세계의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데 대하여, 자아의 인식 또는 각성을 위한 내적 표준을 나타낸다. -교육은 각성)


이 세가지의 안과 밖이 있는데, 안은 안끼리, 또 밖은 밖끼리 나타내고 있는 공통된 의미,  즉 우리의 삶에는 ‘밖을 향한 삶’과 ‘안을 향한 삶’이라는 두 가지 삶의 자세가 있을 수 있다.

310쪽 이 두 가지 삶의 자세가 각각 어떤 것인가?

우리가 보통 삶이라고 부르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삶, 사람들은 저마다 숭고한 것이건 비열한 것이건 간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에 급급해 있고, 그 성패에 따라 환호도 하고 좌절도 한다.  이런 쪽으로 방향지어진 삶이 ‘밖을 향한 삶’일 것이다. ‘사는가 싶게 사는 삶’일 것이다.

‘밖을 향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 ‘안을 향한 삶’은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거의 죽음에 가까운 삶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목적 달성이 가질 수 없는 그 나름의 광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잘 가꾸어진 광채나는 영혼을 가지는 삶이다.

둘 중의 어느 삶이 가치있는 삶인가 하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말하거나 누가 누구를 설득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채로운 삶이 그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투명한 삶과의 대비 때문이라는 것이다.

311쪽

우리는 산이 옮겨가는 외적 결과보다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는 내적 완성에 일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산을 옮기는 것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다가는 결코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질 겨를이 없을 것이다.


<독후감>

(안과 밖의 대비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다층적인 교육의 양상을 잘 분석하였다. 결국 인간은 외적인 어떤 영화의 산물을 내어놓은 일보다 내적 충일성, 인간다움, 인격의 완성이라고 할까? 하는 것이 삶과 교육의 목적일 것이다.

저자가 교육이란 앎과 삶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위치를 계속 지켜 나가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정의하듯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적 충일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적 충일성, 그것의 연원을 따져가면,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존재 기반에 다다르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도, 요구한 것도 아니고,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아들이라는 말이 고대의 시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것이고, 오늘날도 여전히 유용하다. 柛에 도달할 인생이 있는가? 오히려 도달하려고 할수록 거기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이 인생의 실상이다. 무엇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크기가 지극히 작은 것이고, 그러니까 그 크기로 보아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의 본질은 겨자씨를 담보하는 것이다. 그 큰 나무를 담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다. 믿음은 자신을 믿는 자기 확신이 아니다. 의존하여 있는 것이다. 즉 상대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다. 산을 누가 옮겨놓을 수 있는가? 믿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산을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그분이 이렇게 해라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교육은 무엇인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에 터한 것이다. 결국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에 방향지워지는 것이다. 삶을 이루는 여러 구성 요소들 중의 하나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교육이지만 삶을 총체적으로 보고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삶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그 삶의 뜻을 구현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교육은 삶을 위한 것이다. 교육이 삶을 이루는 한 중요한 부분이 된다. 삶과 유리되어 교육은 존립할 수 없다. 자라가는 것 그것이 삶이고 자라감에 있어서 교육은 핵심적인 자원이 된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삶, 누구도 그 끝을 모른 삶, 마치 소경이 코끼리의 여러 부분을 만져보고 그것이 코끼리라고 선개념에 의해서 단정지워 버리는 것처럼, 이렇게 교육을 논한 많은 불완전한 논의, 곧 인식, 앎 속에서 교육은 닫혀있는 것이다. 眞善美를 이야기하는 이렇게 황홀하고 그럴듯한 교육이 그야말로 사람을 옭아매는 큰 동앗줄이 되는 이 실상을 누가 알 수 있는가?


나는 모른다. 정말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 하루를 살고 지금까지 살아왔고 내일도 삶이 허락되면 살 것이다. 시작도 끝도 넓이도 깊이도 모르는 안개 속을 걸어가듯이 말이다. 

과연 인생은 무엇인가? 누가 말해줄 수 있는가? 사람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셔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주셔야 삶의 목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공급해주셔야 나는 살 수 있다. 그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누가 이 일을 하시는가? )

 

303쪽 

3. 안으로 파고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하여, 밖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듀이에 비하여 피터즈가 더 안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피터즈가 지식의 가치를 외적 결과로부터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 논리에 따라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밖에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안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밖의 의미를 좀더 넓힐 필요가 있다. 듀이에 있어서 ‘밖’은 외적 결과를 일으키는 것, 즉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터즈에 있어서 ‘밖’은 실천뿐만 아니라 사태나 현상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터즈에 있어서 ‘안’을 나타내는 지식은 실천 뿐만 아니라 현상까지도 포괄하는 ‘밖’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피터즈가 말하는 ‘지식’의 경우에도, ‘지식’이 그 내용으로 하는 법칙은 현상에서 도출된 것이며, 엄밀하게는 현상 속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밖’에 대한 이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304쪽 이 마지막 ‘안’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한 단서는 키에르케고르의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지식’에 대한 구분에서 찾을 수 있다. 1) (

 S. Kierkegaard,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D.F. Swenson and W. Lowrie, trans.), Princeton Univ. Press, 1941. )

이 두 가지 지식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구분은 지식이 자아의 인식 또는 각성에 관련되는가 아닌가에 의한 것이다. <키>에 의하면 주관적 지식은 윤리․종교적인 지식으로서, 이것만이 자아의 인식과 각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그 이외의 지식은 객관적 지식으로서 자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구분에 의하면 앞의 피터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객관적 지식이며, 따라서 그것은 자아의 인식과 각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밖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그 점에서 그것은 자아의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주관적 지식과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자아에 대한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두 가지 인식이 종류에 의하여 구분된다고 보아야 하는지, 또 두 가지 인식이 모종의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는지?

예를 들어, 객관적 지식으로서 과학적 지식은 과학적 방법으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개념을 사용한다. 개념은 실재의 한 부분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인식의 수단이지만, 그 개념은 또한 실재에 바탕을 둔, 실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으로 현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실재에서 나온 개념으로 실재를 파악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비유하자면 과학적 지식은 실재와 개념 사이의 폐쇄회로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305쪽

<키>의 표현에 따르면, 객관적 지식은 ‘思考와 思考의 일치’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폐쇄회로에는 자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자아는 언제나 그 폐쇄회로에서 비켜서 있다. 자아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적 지식은 자아와는 떨어진 채 헛돌아가는 셈이다. 우리가 과학적 지식을 아무리 많이 축적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아의 의미-나는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가 더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은 자아가 스스로를 비추어 볼 이상적(理想的) 표준을 구 내부에 갖추게 될 때 비로서 가능하다. 자아의 인식 또는 각성은 이 이상적 표준에 비추어 스스로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키>에 있어서 이 이상적 표준은 기독교적인 신(神)이다.

이 이상적 표준을 규정하기 위해서 <키>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개념을 ‘죄’의 개념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키>에 있어서 神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이상적 표준을 나타낸다. <키>가 한 것과  거꾸로, 그의 ‘죄’의 개념을 도로 소크라테스의 ‘무지’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자아의 인식이나 각성을 세속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자아인식은 곧 완전한 지식이라는 이상적 표준에 비추어 스스로 무지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상적 표준은 자아의 바깥에서 헛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내부에서 자아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상적 표준은 세계의 인식을 위한 객관적 지식이 ‘밖’으로 나타낸다고 보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안’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새롭게 규정된 안의 의미를 ‘道’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도는 앞에서 말한 객관적 지식으로서의 道, 器에 관한 道, 간단히 ‘밖의 道’와는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밖의 道는 우리가 성취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지식이지만, 안의 道는 우리에게 부족과 결핍을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밖의 道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 하는 표준을 나타내는 데 비하여, 안의 道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표준을 나타낸다.

동양적 개념으로서의 道는 오히려 이와 같이 우리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하고 완전무결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06쪽

밖의 道에 비추어 교육의 의미를 규정하면, 교육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점점 쌓아가도록 하는 일로 규정되지만, 안의 道에 비추어 보면 교육은 점점 우리 자신이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는 일로 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교육을 앞의 ‘적응’이나 ‘성년식’에 대하여 ‘각성’으로서의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2) 

(이 세 가지 교육의 의미를 간략하게 한자로 표시하면 ‘技’로서의 교육, ‘學’으로서의 교육, ‘道’로서의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學에는 플러스적 의미가, 또 道에는 마이너스적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자아로 하여금 무지와 부족을 깨닫도록 하는 일을 교육이라고 할 때, 교육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 안의 道라는 것은 밖의 道의 裏面에 불과하다는 것, 밖의 道와 안의 道는 표리의 관계, 또는 긍정과 부정,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안의 道와 밖의 道는 동일한 과정을 반대 방향에서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다. 플러스 쪽에서 보면 우리는 지식을 배우고 쌓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이너스 쪽에서 보면 우리는 점점 완전무결한 知에서부터 멀어져 가는 것으로 보인다. 완전무결한 知에서 멀다는 느낌은 오직 우리 내부에 이상적 표준이 있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이상적 표준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우리는 그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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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잔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되고 또 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니

이것이 단순히 말잔치라고는 할 수 없다.

 

제5판 교육의 목적과 난점 (이홍우)

교육과학사, 1987,

-교육의 성립기반과 목적

-교육은 앎과 삶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위치를 계속 지켜 나가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293쪽 14. 안과 밖의 논리

-안의 변화가 밖의 변화를 따라가도록 해야 한다.

-문화(인식과 습관)의 변화가 문명(물질)의 변화를 따라가도록 해야 한다.

-안의 변화가 밖의 변화에 비하여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요, 이른바 ‘문화지체(文化遲滯)’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는 현상이다.

-외적인 시설이나 제도의 변화에 사람들의 생각이 따라가지 못할 때, 그 새로운 시설이나 제도나 사람들의 종래의 생각 때문에 변형되고 왜곡된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만 보아도 교육적인 의미를 충분히 가진다.

-교육은 새로운 시설이나 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같은 외적인 변화, 그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을 다루며, 외적인 변화를 꾀하는 경우에도 사람의 생각을 통하여 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


<안과 밖의 의미 - 점차적인 몇 단계- 각각의 단계에서 규정되는 안의 의미에 비추어 교육의 의미가 어떻게 다르게 규정될 수 있는가를 생각>

1. 안의 변화가 밖의 변화에 따라서 점차로 저절로 일어난다.

-교육이 사람의 생각을 다루는 만큼, 개량된 주택에 오래 살게 됨으로써 주택의 개념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분명히 교육의 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듀이-적응, ‘안’의 생각은 ‘밖’의 상황에 의존한다, 이렇게 밖의 상황에 의존하는 안의 생각이 교육에서 전수되어야 할 내용이다.


2. 도(道와) 기(技)는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에피스테메(episteme)/ 테그네(techne)

-앞의 1에서 도와 기는 모두 ‘안’에 있는 것이다. 모두 사람의 안에 있는 것이다.

-안과 밖의 구분은 그 양자를 구분하는 데에도 의미 있게 적용될 수 있다.

-우선, 기가 외적 결과를 추구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외적 결과를 추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발휘된다는 것이 분명, 소 잡는 것과 관련지어, 기(技)는 칼날을 부러뜨리거나 힘을 들이지 않고 소의 뼈와 살을 갈라서 ‘고기가 와르르 헤지도록’ 하는 포정의 행동을 가리킨다. 비록 그것이 포정이 가지고 있는, 따라서 포정(庖丁) 안에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외적 결과라는 형태로 표출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보는 문혜군(文惠君)의 눈에도 드러나는 것이다.

포정의 항의 - “왕께서 나의 행동을 기(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순전히 바깥에 드러나는 결과를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왕께서는 어찌하여 바깥에 드러나는 것만 보시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십니까? 나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훌륭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소잡는 솜씨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생각입니다. 왕께서 이것을 보지 못하시니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技가  추구하는 바가 외적 결과라면, 생각 또는 안목으로서의 道는 무엇을 추구한다고 보아야 합니까? 포정의 이야기는 도와 기 사이에 완전히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서 道의 추구하는 바는, 궁극적으로는, 기의 그것과 다를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포정의 道, 즉 소를 잡는 동안에 포정이 하는 생각은 소를 잡는 일과 관련된 생각이며, 그것은 당연히 소를 잡는 技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포정의 소잡는 기가 뛰어난 것은 바로 그가 그러한 생각 또는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만약 그 생각이나 안목이 없다면 아무도 그 포정처럼 훌륭한 기를 발휘할 수 없으리라는 것, 그리고 훌륭한 技라는 것은 정의상 생각이나 안목에 바탕을 둔 기를 뜻한다는 주장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을 반영하는 교육이론은 곧 듀이에 의하여 대표된다.

(교육의 내용은 본질상 문제사태의 해결-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적 결과’를 실현한다는 뜻으로서의 문제 사태의 해결-에 수단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문제해결의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여, 외적 결과라는 것은 성격상 생각이나 안목이 없이도 효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반대로 생각이나 안목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외적 결과를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춤을 잘 춘다-이 문제는 춤을 만든 사람(안무가)의 생각과 춤을 추는 사람(무용수)의 새악, 그리고 춤을 보는 사람(관객)의 생각이 얽히어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의사소통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기준과 그것의 통용)


300쪽-외적 결과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이나 안목이 어떤 점에서 가치를 가지는가-피터즈의 교육이론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려는 데에 그 주안점이 있다.

피터즈는 교육과 훈련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듀이의 이론과 피터즈의 이론을 비교해 볼 때, 두 이론에서 ‘실천(實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취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듀이의 이론에서는 실천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지식의 중요성은 반드시 이 실천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피터즈의 이론에서는 실천은 지식의 대상이 된다는 뜻에서, 지식에 비하여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실천은 우리가 지식을 통하여 이해해야 할 대상이며, 그 점에 있어서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태나 현상과 다름이 없다.

-두 이론 사이의 이런 차이는, 技와의 관련에서 道의 지위를 상이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듀이의 이론에서는 도가 기의 수단(手段)으로서 파악되는 데 비하여, 피터즈의 이론에서 도는 기와는 별도로, 오히려 技와는 별도이기 때문에 중요성을 가진다.


-技를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외적 결과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라는 점, 또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만으로 그 중요성은 충분히 설명된다. 이 점에서 技는 그 보상을 그 자체내에 이미 갖추고 있는 셈이다. 技가 실현하고자 하는 외적 결과가 바로 技의 보상이다. 만약 도가 그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 기와 구분된다면, 도에는 기의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고 보아야 하며, 만약 보상이 있다면 그것은 기의 보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않된다.

301쪽 -피터즈는 道라고 한 것의 가치를, 技의 外在的 가치에 대하여 內在的 가치로 설명하고 있다.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라는 말에도 안과 밖이라는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어떤 것이 내재적으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그것에서 논리적으로 추론되어 나오는, 그것의 의미가 가치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내재적 가치는 지식의 개념에서 논리적으로 분석되어 나오는 지식 자체의 가치를 가리킨다.

(논리적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하는 것은 뇌 속의 판단과 사고 작용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인격 실존의 작용이요, 이것이 가치 있다는 것은 그 인격 실존의 일관성이나 선악을 분별하거나 찬반을 판단하거나 명료하게 사고한다든가 하는 추상적 실존의 반영인 것이므로 그 심원이 깊다. 단순히 찰라적인 반짝 이벤트가 아닌 것이다. 결국 영원과 연결되어 있고 인간 실존의 신비와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가 되는 점에서 참으로 고상하고 고귀한 것이다. 물질의 역동적 결과에 의한 문명의 유적들이 찬란한 듯 보이나, 사실은 그것조차도 이런 인간 실존의 영적 결과의 반영물인 것이다.)

이것은 피터즈가 말한 지식 자체의 가치, 즉 일관성, 합리성, 공정성, 명료성 등의 가치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지식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지식의 개념에 들어 있는 지식 그 자체의 특징은 그 지식을 소유할 때의 마음의 특징과 다를 수 가 없다.

302쪽 외적 결과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이나 안목이 어떤 점에서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피터즈는 지식 그 자체의 특징이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지식에는 일관성, 합리성, 공정성, 명료성 등이 그 내적 기준으로 붙박혀 있으며,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을 인정되기 때문이다.

피터즈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계속된 지식 탐구의 전통으로서 우리에게 전해내려 오고 있고 우리는 그 전통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은 이 전통의 가치를 후세대에 전달해 줌으로써 후세대를 그 전통에 입문시키는 일이다. 이런 뜻에서 피터즈는 교육을 ‘성년식(成年式)’이라는 용어로 규정한다. 1)

( 1) R.S. Peters. Ethics and Education, George Allen and Unwin, 1966, ch.2. )

듀이는 도가 기의 수단이 된다는 관점에서 교육의 의미를 규정한 반면에, 피터즈는 도가 기와는 별도로 가치를 가진다는 관점에서 교육의 의미를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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