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쪽
피아제의 견해에 의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적 발달'은 '구조'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그러니 자아의 발달을 규정하려면 우리는 자아의 '구조'가 발달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즉, 우리는 자아가 개인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는가 하는 것 이상으로 자아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뜻에서의 자아의 발달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사람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아다. 그러나 자아는 무엇인가? 사람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성의 종합, 한 마디로 하나의 종합니다. 종합은 두 요소 사이의 관계이다. .....’
321쪽
자아의 구조를 알아내는 데에 필요한 정도로 생각해본다.
‘사람’과 ‘자아’는 둘 다 ‘관계’이지만, ‘사람’은 ‘종합’이며 ‘否定的 제 3요소’이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부정적 제3요소’로서, 그것은 ‘사람’이다. 또한, 사람은 ‘무한과 유한의 종합, 시간과 영원의 종합, 자유와 필연서의 종합’으로서, 이 종합은 아직 자아가 아니다.
여기서 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되어 있는 실체이며, 유한과 무한의 종합 등등이 하나의 ‘종합’으로서, 다시 말하면 고정된 실체로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아직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 남아 있는 한, 종합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할 부정적 요소로 남아 있는 것이며, 이것은 유한과 무한의 관계 등등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것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대체로 말하자면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된 자아는(즉,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이것은 개념상의 구분이다. 실제로 이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논의를 위한 구분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계속 진행하자. 독서를 위해서) 그 내부에 그것이 관계를 맺어야 할 또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아는 이 두 자아 사이의 관계(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아의 내부에 들어 있는 두개의 요소를 키.는 [현실성]과 [가능성]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키.에 의하면, 자아의 구조는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
테일러는 키.의 자아의 구조를 규정하여, ‘자아는 현실성과 가능성이 결단의 순간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한다.
(Mark C. Taylor, Kierkegaard's Pseudonymous Authorship: A Study of Time and the Self, Princeton Univ. Press, 1975, p283.)
만약 현실성과 가능성이 자아의 구조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요소라면, 이 두 개의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는 ‘사람’이라고는 부를 수 있을지언정, ‘자아’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322쪽 테일러는 키.의 자아관을 역사적으로 대두된 다른 두 가지 자아관과 대비시키고 있다. 1) ‘實體로서의 자아’, 2) '過程으로서의 자아‘(헤겔)이며, 키.의 자아관을 테일러는
3) ’關係로서의 자아‘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실체로서의 자아와 관계로서의 자아의 대비에 있다. 실체로서의 자아는 ‘기능으로서의 자아’와 통하고, 관계로서의 자아는 ‘구조로서의 자아’와 통한다.
1. 자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취된다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테일러의 용어로, ‘현실성과 가능성의 결단에 의한 관계’(‘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는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고 개인이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자아심리학에서의 ‘관계’는 자아와 타인의 관계일 뿐이며, 자아는 그 관계를 맺는 실체로 파악된다. 그러나 키.의 관계는 자아의 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는 구성요소들 사이의 관계이며, 따라서 관계 그 자체가 자아의 개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 자아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의 성취와는 달리, 키.의 자아관에 나타내는 자아의 성취는 개인의 심각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진정한 성취이며, 그 성취는 또한 단계를 따라 점점 도달하기 어려운 것으로 되어 있다.
323족
<키.의 자아의 발달단계>
자아라는 것이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세 단계를 지배하는 논리는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이 점차적으로 날카로와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1) 審美的 단계는 아직 자아가 생기지 않은 단계이다.-이때 가능성은 현실성의 단순한 연장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주어진 것은 오직 영혼과 육체의 실체, 키.의 용어로 ‘否定的 제3요소’라고 한 것, 아직 관계 속에 들어오지 않은 불완전한 자아이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이 단계에서 자아는 ‘즉각적인 현재’이외의 하등 다른 기준을 가지지 못한다.
(로저스는 ‘충만하게 기능하는 사람’을 기술하면서, 그는 ‘즉각적인 현재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로저스가 보기에 자아가 발달한 상태는 키.에 있어서는 아직 자아가 생기지도 않은 상태이다.-도예베르트가 말하는 ‘순진경험’의 세계와 통하는 것 같다.)
심지적 단계에서의 자아가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긴장을 일으킬만한 두 개의 극이 없는 것이다. 단순히 부평초처럼 떠다니면서 순간순간의 ‘개인적 경험을 심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은 윤리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에서 나타난다.
324쪽
2) 윤리적 단계에서 현실성과 긴장 관계에 있는 ‘가능성’은 인간 세상의 윤리적 규범이다.
윤리적 규범은 심미적 단계에서의 자아, 즉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서의 실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선택’을 필요로 한다.
-윤리적 단계에서의 가능성인 이 윤리적 규범은 결코 심미적 단계에서와 같은 자아의 연장이라고는 볼 수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현실성과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고, 그 거리로 말미암아 현실성과 가능성 사이에는 긴장이 생기는 것이다.
고무줄처럼 현실성과 가능성의 긴장이 가장 날카로와지는 것은 현실성과 가능성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즉 심미적 단계에서와 같이 가능성이 현실성의 연장인 상태와는 정반대되는 상태에서일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 단계이다.
3) 종교적 단계에서의 가능성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의 경지, 또는 ‘神
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 세계의 윤리적 규범을 따라서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윤리적 단계에서의 가능성은, 비록 심미적 단계에서와 같은 의미에서의 현실성의 연장은 아니라 해도, 현실성으로부터 원칙상 도달가능한 범위에 있다는 뜻에서 여전히 현실성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단계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가능성이 현실성과 조금도 닮은 점이 없다. 키.의 용어로, ‘천길 낭떠러지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윤리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에서 자아의 현실성이 대면하고 있는 가능성은 각각 ‘世俗의 역사’와 ‘聖域의 역사’를 대표한다. 세속의 역사에서 준수되는 원리, 즉 인간 세계의 윤리와 성역의 역사에서 준수되는 원리, 즉 신의 뜻은 그 종류에 있어서 완전히 구분된다. 그리고 만약 윤리적 단계보다 종교적 단계가 자아발달에서 높은 단계를 보여 준다면, 세속의 역사는 聖域의 역사를 위한 ‘試補(시보) 기간’이라는 키.의 말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윤리적 단계에서 현실성과 가능성의 균형은 그 단계로서는 완전한 것 같지만, 종교적 단계와 비교해 보면 윤리적 단계에서의 가능성은 현실성 쪽으로 훨씬 치우쳐 있고, 따라서 새로운 균형이 요구되는 것이다.)
325쪽
이 세단계는 일회적, 직선적 발달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삶의 과정에서 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되어야 하지만, 거의 동일한 순간에 자아를 둘러싸고 있다.
키.는 ‘자아의 힘은 그 척도의 힘에 비례한다.’고 말하였다.(Taylor, 상계서, p.283) 여기서 ‘비례한다’는 말은 ‘의존한다’는 뜻을 그 속에 이미 포함하고 있다. 자아가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척도, 자아가 느끼는 긴장의 대상, 그것이 크고 힘있는 것일 때, 그리고 그 정도에 비례하여 자아도 크고 힘있는 것이 된다. 神이 참으로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자아는 종교적 단계에서 가장 크게, 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자아심리학의 자아관의 본질과 결함을 보여준다.
326쪽
자아심리학에서의 자아는 그 실체 이외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자아의 가능성을 실현(자아 실현)은 어디까지나 자아의 내부에 ‘잠재적인 형태’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적 기준 이외의 기준은 ‘진정한 자아’에 방해가 되는 것이며, 자아를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축소시킬 뿐이다. 자아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키,의 발달단계는 거꾸로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신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 사회의 다른 사람들, 특히 윤리적 규범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는 어른들의 말에 따라 사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되는 것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로저스가 ‘충만하게 기능하는 사람’을 기술하는 데에 사용한 ‘의미있다든가, 풍요하다든가, 흥분을 일으킨다든다, 보람을 안겨준다든가, 도전감을 자극한다는’ 등의 표현은 얼른 생각하기에도 키.가 말한 종교적 단계에서의 삶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로저스 ‘충만하게 기능하는 사람’의 모습 1, 현실적(억압하고 있는 경험을 모두 의식하고 수용하며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음), 2. 주체적(타인의 비판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판단을 하며 자립적으로 행동함), 3. 적극적(불안이 없고,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지향적인 생활의욕을 나타냄), 4. 사회적(타인과 자유롭게 개방적인 인간관계를 가리려 함), 5. 창조적(문제에 독자적으로 적응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C. Rogers, 'The Concept of the Fully Functioning Person,' Psychotherapy, 11(1963), pp. 7-26)
종교적 단계에서 자아가 대면하고 있는 가능성은 그러한 ‘충만한’ 느낌을 주는 대상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가장 비참한 죄인임을 느끼게 하는 그런 대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아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자아가 실현해야 할 기준이 심리적 실체로서의 자아 내부에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성취할 것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들린다.
327쪽
자아가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교육은 여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자아발달과 교육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교육이라는 말을 ‘교과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한정해서 말해보자.
가령 어떤 사람이 ‘교과 공부는 자아발달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고 하자. 이 말을 자아심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교과 공부가 ‘의식된 자아’를 고양하는 데에, 즉 긍정적 자아 개념을 길러주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도 괜찮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반면에, 키.식의 자아발달, 교과공부가 종교적 단계에 도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곧 교과 공부가 ‘나는 비참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는 뜻이 될 것이다. 동일한 교과 공부가 이렇게 이중의 양상을 가진다면,
328쪽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아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발달과 교과 공부는 오직 우연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자아심리학에서 볼 때 교과 공부는, 친구와 잡담을 하거나 원고를 쓰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일로, 자아가하는 여러 가지 기능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 교과 공부를 하는 동안에 ‘意識된 자아’가 고양되며(물론, 저하되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는 다시 교과공부라는 기능을 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안범희 역, W.W. 퍼어키, [자아발달과 교육], 문음사, 1985 )
그러나 키.의 자아발달에 있어서는 형편이 아주 다르다. 만약 교과 공부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일이라면, 교과 공부는 곧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일 그 자체이다. 교과 공부는 바로 종교에서의 신에 대한 교육적 대응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 교육학에서는, 아마 자아심리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개인이 그 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심리적 실체로서의 개인이 장차 나타내게 될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온 것 같다. 키.의 자아이론은 적어도 이 그릇된 연상을 시정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독후감 : 인간이 무엇인가? 자아가 무엇인가?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어떠한가?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자아의 발달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점등은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에세이다. 긍정적 자아개념이라고 하는 허구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상적인 자아발달, 즉 플라톤적인 이상론의 환상 역시 배제할 수 없는 글 솜씨이다. 현실성과 가능성, 사람은 분명 식물의 씨앗과 다르지만, 씨앗은 단계별로 가능태를 노출한다. 그 완성태는 씨앗 속에 있다고 할 때, 씨앗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발달의 열쇠를 말한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환경이라는 외부적 요소가 없이는 발현될 수 없다. 쾌적한 환경 속에서만 씨앗이 담고 있는 가능성을 100%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가능성은 무엇인가? 정자와 난자가 엄마 자궁에서 만나서 정착되어 핵분열로부터 하나의 생명 개체로서 성장 발달해 가는 과정에서 인간다움을 어디서 어떻게 획득하고 구현해 가는가? 과연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전제가 각각 다르다. 종교관에 따라서 그러하다. 다른 말로 하면 신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런대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것이 하나라고 자기들안에서 통일시킨다. 아무리 천만인이 소리쳐대도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로 변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어린 아이가 미약한 소리로 말하더라도 ‘진리’는 그 힘을 열매로서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삶을 매개로 한 교육이란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마치 우물 안에 갇혀있는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계에 대하여, 또는 동굴 속에 갇혀있는 원숭이가 동굴 밖의 만물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은 이 사유 세계의 개념들 속에서 희미한 빛처럼 보이는 것들이 이러하니, 광명의 진리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소경위에 소경이 되고 말지 않겠는가?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자이신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인격으로 의사소통하시는 하나님 천지의 대 주재이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한 어린 아이에게도 인생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고 알게 하시고 생명으로서 생명을 누리며 풍성하게 누리게 하신다. 자라가게 하신다. 사람이므로 분수를 알고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게 하신다. 신령한 찬미를!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싸잡아서 말하는 듯 하나 이 에세이의 진정성과 가치를 그만큼에서 누리고 그것을 사로잡아서 선을 이루는데 사용한다. 감사한 일이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빚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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