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쪽
3. 안으로 파고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하여, 밖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듀이에 비하여 피터즈가 더 안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피터즈가 지식의 가치를 외적 결과로부터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 논리에 따라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밖에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안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밖의 의미를 좀더 넓힐 필요가 있다. 듀이에 있어서 ‘밖’은 외적 결과를 일으키는 것, 즉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터즈에 있어서 ‘밖’은 실천뿐만 아니라 사태나 현상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터즈에 있어서 ‘안’을 나타내는 지식은 실천 뿐만 아니라 현상까지도 포괄하는 ‘밖’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피터즈가 말하는 ‘지식’의 경우에도, ‘지식’이 그 내용으로 하는 법칙은 현상에서 도출된 것이며, 엄밀하게는 현상 속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밖’에 대한 이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304쪽 이 마지막 ‘안’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한 단서는 키에르케고르의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지식’에 대한 구분에서 찾을 수 있다. 1) (
S. Kierkegaard,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D.F. Swenson and W. Lowrie, trans.), Princeton Univ. Press, 1941. )
이 두 가지 지식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구분은 지식이 자아의 인식 또는 각성에 관련되는가 아닌가에 의한 것이다. <키>에 의하면 주관적 지식은 윤리․종교적인 지식으로서, 이것만이 자아의 인식과 각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그 이외의 지식은 객관적 지식으로서 자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구분에 의하면 앞의 피터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객관적 지식이며, 따라서 그것은 자아의 인식과 각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밖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그 점에서 그것은 자아의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주관적 지식과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자아에 대한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두 가지 인식이 종류에 의하여 구분된다고 보아야 하는지, 또 두 가지 인식이 모종의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는지?
예를 들어, 객관적 지식으로서 과학적 지식은 과학적 방법으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개념을 사용한다. 개념은 실재의 한 부분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인식의 수단이지만, 그 개념은 또한 실재에 바탕을 둔, 실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으로 현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실재에서 나온 개념으로 실재를 파악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비유하자면 과학적 지식은 실재와 개념 사이의 폐쇄회로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305쪽
<키>의 표현에 따르면, 객관적 지식은 ‘思考와 思考의 일치’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폐쇄회로에는 자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자아는 언제나 그 폐쇄회로에서 비켜서 있다. 자아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적 지식은 자아와는 떨어진 채 헛돌아가는 셈이다. 우리가 과학적 지식을 아무리 많이 축적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아의 의미-나는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가 더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은 자아가 스스로를 비추어 볼 이상적(理想的) 표준을 구 내부에 갖추게 될 때 비로서 가능하다. 자아의 인식 또는 각성은 이 이상적 표준에 비추어 스스로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키>에 있어서 이 이상적 표준은 기독교적인 신(神)이다.
이 이상적 표준을 규정하기 위해서 <키>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개념을 ‘죄’의 개념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키>에 있어서 神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이상적 표준을 나타낸다. <키>가 한 것과 거꾸로, 그의 ‘죄’의 개념을 도로 소크라테스의 ‘무지’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자아의 인식이나 각성을 세속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자아인식은 곧 완전한 지식이라는 이상적 표준에 비추어 스스로 무지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상적 표준은 자아의 바깥에서 헛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내부에서 자아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상적 표준은 세계의 인식을 위한 객관적 지식이 ‘밖’으로 나타낸다고 보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안’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새롭게 규정된 안의 의미를 ‘道’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도는 앞에서 말한 객관적 지식으로서의 道, 器에 관한 道, 간단히 ‘밖의 道’와는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밖의 道는 우리가 성취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지식이지만, 안의 道는 우리에게 부족과 결핍을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밖의 道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 하는 표준을 나타내는 데 비하여, 안의 道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표준을 나타낸다.
동양적 개념으로서의 道는 오히려 이와 같이 우리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하고 완전무결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06쪽
밖의 道에 비추어 교육의 의미를 규정하면, 교육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점점 쌓아가도록 하는 일로 규정되지만, 안의 道에 비추어 보면 교육은 점점 우리 자신이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는 일로 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교육을 앞의 ‘적응’이나 ‘성년식’에 대하여 ‘각성’으로서의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2)
(이 세 가지 교육의 의미를 간략하게 한자로 표시하면 ‘技’로서의 교육, ‘學’으로서의 교육, ‘道’로서의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學에는 플러스적 의미가, 또 道에는 마이너스적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자아로 하여금 무지와 부족을 깨닫도록 하는 일을 교육이라고 할 때, 교육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 안의 道라는 것은 밖의 道의 裏面에 불과하다는 것, 밖의 道와 안의 道는 표리의 관계, 또는 긍정과 부정,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안의 道와 밖의 道는 동일한 과정을 반대 방향에서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다. 플러스 쪽에서 보면 우리는 지식을 배우고 쌓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이너스 쪽에서 보면 우리는 점점 완전무결한 知에서부터 멀어져 가는 것으로 보인다. 완전무결한 知에서 멀다는 느낌은 오직 우리 내부에 이상적 표준이 있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이상적 표준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우리는 그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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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잔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되고 또 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니
이것이 단순히 말잔치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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