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사야 53:10)
모든 사람들은 상함에서 건짐받기를 원한다.
누구도 자신을 상함에 내어주기를 원하는 자는 없다.
오히려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주의하고
자신의 힘이 모자랄 경우에는 다른 힘(의학의 힘
과학의 힘, 사회 세력의 힘, 문화의 힘, 그리고
종교의 힘)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 어디에 있는가?
여호와께서
누구에게 상함을 받게 하기를 원하시사
질고(온갖 고생)을 당하게 하신다.
마음에 깊은 고민을 하다가 이 말씀에 부딛혀서
하늘을 쳐다 본다.
마음에 상함을 입어서
생사화복이 주의 손에 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에게는 생명과 복으로 하시고
주를 슬프시게 하는 자에게는 죽음과 화로 하신다.
이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생사화복 그 자체가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그것이 사용되어짐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
생명의 부활이 있음을 생각한다.
죄로 인한 저주와 사망의 세상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한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라도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주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의 고통은 죄의 징벌이다.
(죄의 징벌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점에서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신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제갈길로 우상숭배의 길로
갈때에 그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시지 않는다.
죄의 징벌의 정도를 생각해보면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말씀대로 지나침이 없게
하신다. 징벌도 공의롭게 하신다. 그런데 징벌하시면서도
만약 그 징벌의 정도를 감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고통을 통해서 어떤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지금도 누가 고행을 하거나
스스로를 괴롭게 하여서 구원에 이르거나 남을 구원할
자는 아무도 없다.
고행과 수도를 통한 구원이나
금욕주의는 마귀의 가르침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받게 하시는
이 질고는 질고 자체로 끝나지 않고
질고를 넘어선 나음이 있기에 그러하신다.
상함을 입은 자, 생명에서 끊어진 자를 위해서
메시야께서 상함을 입고 생명을 내어줌으로
나음을 입고 죽음에서 건져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이 질고를 당함은
고행과 금욕주의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을 것인가?
메시야에게 고통을
감당하게 하시므로 주시는
그 고통을 넘어선 나음에 참여하기를
바라야 할 것인가?
이것이 인간 중심이다. 지극히 인간 중심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 중심으로 말씀하셨다.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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