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성신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야 신령한 삶,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성신의 인도를 받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40년을 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점들이 많다.

이제 김홍전 목사님의 강설집 중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열매]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실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점들을 많이 가르쳐 주신다.

 

갈 5:16-17“너희는 성신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신을 거스리고 성신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어느 편이든지 하나가 그 위에서 전적으로 그의 영혼의 기능을 운전하는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다. 성신님이 내 영혼의 전 기능을 운전하시든지 내가 나를 운전하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고로 내가 싸워야 할 중요한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 혹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위하여 힘쓸 때에 그 힘쓰는 일, 그 싸움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뭐냐 하면 나의 육체의 의욕이다. 나 자신의 의욕이 나를, 내 영혼의 기능을 운전하고 지배하고 나가려는 그러한 요구와 움직임을 향해서 늘 싸워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육체의 소욕이라는 것은 뭔가

169쪽 성경은 그 다음에 현저한 육체의 소욕 열일곱 여덟 가지를 죽 거기에 기록해 놓았다. 현저한 악덕 패덕(悖德)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체의 소욕이라는 것, 육신, 혹은 육체라는 말, 사륵스(σάρξ)라는 말은 항상 인간 자체를 의미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즉 에피쒸미아(έπιθυμία)는 이상적일 수 있고 도덕적일 수도 있다.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욕망이 있어서 그것이 자기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심정이 발생하도록 한다.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성신을 좇아서 행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성신께서 나를 전적으로 주장하신다’는 말은 지배하시고 억압하시고 압도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결국 당신이 내 영혼을 운전하는 주체가 되신다는 말이다.


사람들 가운데 청년들, 특별히 인텔리켄차아들은 자기가 본 것이 자기를 항상 압도할 때에는, 물론 특별히 흥미있게 보고 그것이 자기를 압도했을 때에는 정신이 멍해 가지고서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그런 습관이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그런 짓을 한다. 이렇게 세상에 있는 철학과 혹은 헛된 속임으로 말미암아 그릇되게 가지말라는 말씀(골2:8 )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성신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대로 가야 할 것이다.


170쪽

주의할 것--------

성신께서 인도한다는 말에서 ‘성신’은 단순한 사상만은 아니다. 성신은 신이시다. 성신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하신 모든 은혜를 적용하시는 신인 까닭에 그 은혜를 나에게 적용하셔야 한다. 그리고 은혜를 적용하실 때에는 먼저 풍부한 지적인 요소로써 적용해 주신다.

성신님이 나를 전적으로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영혼의 기능을 지배하고 움직이고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항상 내게 싸움이 되는 것이다.

싸움은 거기에 있다. 내가 성신께 전부를 드리고 전부를 온전히 드린 자다운 경계 가운데서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이 싸움이다. 어떤 문제에서 요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항상 사람은 어떤 문제에서 좌할 것인가 우할 것인가 하고 스스로 토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싸움이라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성신에 충만한 사람이라도 문제에 임해서는 자기 스스로 토론해야 한다. 갈림길에 선 사도 바울의 예,

그럴 때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영혼의 기능이 가장 합리적으로 유효하게 작용되어야지, ‘내가 암만 생각해도 소용없으니 성신님, 이렇게 해 주십시오’하면, 성신님의 생각이 별달리 와서 그 생각이 내 생각을 지배해 버릴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별달리 오는 것이 아니다. 별달리 오기를 바란다면 입신(入神)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으니까 그것은 성신의 생각이라고 한다면 큰 잘못이다.

171쪽

문제는 자기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정당하게 토론해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을 때에 자기가 예리하게 하나님이 주신 이 논식에 의해서 정당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덮어 놓고 일시의 충격이나 직관에 의해서만 행동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부정당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을 때 면밀하게 그 일을 추구하고 면밀하게 판단하는 작용도 하나의 싸움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을 그렇게 하기 싫고 적당하게 느끼는 대로 하고 남에게 물어서 의논해서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힘쓴다’고 할 때에는 그런 점에서도 항상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나에게 이제 임했으면 그 생명이 생명으로서 내 안에서 바로 발휘되어서 새사람의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셔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은사, 영혼의 기능을 가장 유효하고 적당히 사용하는 데에 있다.

이런 것을 쓰지 않고 무시해 버리고 딴 것이 와서 나를 압도하기를 바라는 것은 힘쓰는 일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가 인간이 아니고 기계요 혹은 동물이다 하고 내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를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로, 더군다나 성신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그런 존재로서 재창조하셨다고 한다면 그 재창조한 데에 의거해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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