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우리는 지금 산길을 산책하고 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푸른 물을 담고 있는것 같고 주위는 온통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발에 채이는 돌은 우리의 오랜 친구들과도 같이 느껴진다.
자연은 살아 움직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다.
이러한 자연들은 항상 우리에게 많은 즐거움과 신선함을 준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나 감동 없이 그냥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과연 이들은 생활에서 찌든 우리들의 권태를 해소하는 한낱 하나의 유희물에 불과한가?
아니면 자연은 스스로 거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인간은 스스로 '자연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연은 늘 변화하고 어떤 방향으로든 진행되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최근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각박하게 달려왔다.
인간들은 자연을 돌아보면서 일반계시적 차원에서 자연을 통하여 피조물의 모습을 깨달아 하나님을 아는 데 힘쓰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연을 이용하여 왔다.
무심코 지나쳐 버리지만, 자연을 보고 감탄할 것은 너무나 많다.
자연의 웅대함에 감탄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리고 자연의 변화무쌍함에 감탄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감탄하면서 살아도, 감탄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자연이 너무나 비범하고 비상식적이며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감탄한다.
실로 우리의 주변은 매일 놀라와 할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우리 자신들이 자연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너무나도 잘 알아서 실제로 인간 생활에 유익하도록 자연을 조정해 나가기도 한다.
나무로 집을 짖기도 하고,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댐을 건설하기도 하고, 바람의 성질을 잘 조사해서 비행기로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나무와 쇠도 잘 이용하면 물에 뜬다는 것을 알고 강이나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을 잘 알고, 잘 이용하여 산과 들, 바다, 하늘, 그야말로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을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을 이용할 줄만 알 뿐이다.
어떤 것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냉장고를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장고가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 음료를 차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냉장고 문만 열면 언제든지 시원한 음료를 마실 수가 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냉장고를 잘 사용한다고 해서 냉장고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인가?
이 사람은 냉장고의 실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 등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것은 자연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진다.
인간들이 자연 속에서 살고, 자연을 호흡하고, 자연을 이용한다고 해서 절대로 자연을 알 수 없으며 더욱이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심성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잘 알고 친숙해져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자연을 잘 모르고 있다.
다만,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의 혜택만 받을 뿐이다.
이용하는 기술이 뛰어나다고(실제로 요즈음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TV가 출하되어 그 기능을 다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TV를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을 잘 알고 있는가?
현대 과학자들은 '그렇다' 고 대답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다.
"옛날에는 신의 저주로만 생각했던 번개와 천둥을 이제는 인간이 그 실체를 알아 피뢰침을 만들어 번개를 피하는 방법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인간은 로케트를 달나라까지 쏘아 땅이 둥글다는 것도 알아내지 않았는가?
또한 하늘에 희뿌옇게 생겨 꼭 강을 닮은 은하수가 실제로는 별들의 무리라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는가?
얼마나 인간이 위대한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담과 같이 가죽옷을 입고 생활하던 때부터 땅은 둥글게 생겼었고 은하수는 별들의 무리였다.
인간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어린 아이가 이제 겨우 TV를 켜고 끄는 방법을 알고나서 마치 TV를 자신이 발명한 것인 양 우쭐대는 것과 같다.
이 어린 아이가 깨닫기 이전부터 TV는 버튼만 누르면 켜지게 되어 있었다.
TV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복잡한 원리에 비하면 이 아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극히 일부분이다.
어린 아이가 TV박스를 뜯어 안을 보게 된다면 그 복잡한 회로들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울 것이다.
오늘날 최첨단의 과학이 마치 이와 같은 현상이다.
TV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이라면 어린아이가 알게 된 TV를 켜고 끄는 방법은 인간의 최첨단 과학이다.
오늘날 인간은 자연을 조금 이용할 줄 안다고 해서 기고만장(氣高萬丈)해 마치 자신이 자연을 만든 창조주쯤이라도 되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알아낸 지식은 자연의 본질중 그야말로 일부분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하이젠베르그에 의해서 발견된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 물질의 극한 부분에까지 도전하여 자연의 본성을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거에 알고 있었던 어떠한 지식보다도 폭은 넓어졌고 깊이는 깊어졌다.
무와 유가 혼돈된 세계까지 인간의 탐구열이 미치고 있다.
그러나 깊이 알면 알수록, 연구를 하면 할수록, 인간지식의 단편성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연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주다가 결국에는 '자연을 완전히 알 수 없다' 는 것을 인간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해버리는 것이다.
자연의 본질이 인간의 손에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 하면 잡으려 할수록 더 멀리 도망간다.
오늘날의 전반적인 과학의 흐름은 실용과학쪽으로 흐르고 있다.
미시세계나 거시세계를 끊임없이 연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생활에 유익하도록, 실용과학의 세력이 점점 커져간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TV가 신기해서 TV를 뜯어 보기도하고 두들겨 보기도 하다가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TV 알기를 포기하고 열심히 TV를 시청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무엇이 이 아이로 하여금 도전의욕을 포기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의 문턱이 높음을 보여 주었는가?
그것을 명백히 보여준 것 역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자연의 본질을 항상 다른 모습으로 일부분만 보여준다.
그러나 결코 전부를 보여 주지 않는다.
인간으로서는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 가 인간의 탐구욕에 한계를 그어 준 것이다.
이로 인하여, 결정론적 사고와 합리적 논리를 신봉하던 서구의 철학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사상 체계와 철학적 구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구조적 사고구조는 서구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의 반대쪽 동양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동양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고 속에서도 직관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유추와 초월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새로운 과학구조 즉, 불확정성의 원리에 맞는 해석의 시각을 아무리 찾아도 없었는데 동양에서는 그것이 일상생활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거 결정론적 사고는 서구인들에게 적합했지만 보다 진실에 가깝고 포괄적인 자연에 대한 인식은 동양인들의 사고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제 새로운 과학의 시대, 새로운 사상의 시대는 동양인들의 심성 깊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태초부터 주관하셨고 오늘날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도록 사역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그 문제의 원리와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 볼 것이다.
Ⅱ. 확정적인 부분과 불확정적인 전체
1. 확정적인 부분
우리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물체의 움직임에 대하여 모호한 예측을 하지 않는다.
나무의 딱딱한 감각과 물의 액체와 같은 성질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살아간다.
탁상 위에 놓아둔 꽃병은 며칠이 지나고 그대로 탁상 위에 있으며 어떠한 외부의 힘을 주지 않는 한 영구히 그곳에 존재한다.
이와 같은 일상적인 믿음들은 사실상 결정론이라 불리는 고전역학에 기초한다.
결정론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금 설명을 가하자면 아래와 같다.
10 이라는 힘으로 밀면 정확하게 10의 크기로 밀려가고, 5정도의 힘으로 당기면 반드시 5정도의 크기로 당겨져온다.
이것은 너무 정확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다.
낙엽이 바람에 날려갈 때 그 바람의 크기와 방향만 알면 낙엽이 어디에 떨어질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우리가 낙엽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것은 단지 크기와 방향을 정확하게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외에는 별 이유가 없다.
또한 태양이 어느 때에 뜨고 달이 어느 때에 지며, 혜성이 몇 년 후에 지구에 다시 가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알아낸 법칙에 정확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이들의 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힘만 있으면 그들을 제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도 별로 신비로운 것이 못된다.
인간은 주변의 다가오는 환경에, 즉흥적으로 대처할 뿐인데, 이 주변의 환경들이라는 것은 인간이 알아낸 위대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반응도 결국은 이 법칙에 지배를 받는 단순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전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일 뿐이다.
이 기계는 뉴톤의 법칙이라는 우주 최고의 법률에 맞추어서 진행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 태양은 큰 톱니바퀴이며 지구는 조그마한 톱니바퀴이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맞추어져 끼워져 있는 작은 나사에 불과하다.
우주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 법률을 지키며 돌아가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연구할 것도 없다.
우주는 이 위대한 법칙의 현장일 뿐이다.
인간의 감성이라든지 낭만 그리고 사랑과 같은 단어들은 단지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TV를 켜고 끌줄 모르던 시절에 비하면 굉장한 발전이다.
과학을 전혀 모르던 인간들이 이제 겨우 과학에 눈을 뜨고나서 보니, 자신이 무엇인가를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포나 총이 발견되기 이전에 인간들은 돌멩이나 창으로 적을 대항하였다.
그러나 대포나 총이 발명되면서 이들을 대치하였다.
총이나 포의 원리가 어떠하던가?
화약이 낼 수 있는 힘과 방향만 정확하게 조준하면 아무리 멀리 있는 물체라도 맞힐 수가 있다.
대포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적군은 산 넘고 물 건너 아주 멀리 있는데도 몇 미터의 착오도 없이 공격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것은 뉴톤역학의 위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뉴톤역학의 위력을 맞본 사람은 그것을 거의 신격화시켜 버렸다.
너무나 자신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 법칙으로 설명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개미가 먹이를 먹고 기어가는 것에서부터 거대한 행성이 오묘하게 서로 충돌하지 않고 운행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이 결정론적 사고방식의 대충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뉴톤역학을 과신한데서 온 부정적인 현상이다.
어느 면에서 볼 때 정말로 뉴톤역학은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조사해서 자료만 많이 모아지면 세상에 그 무엇도 이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알고 있는 것만큼 통제도 가능하였다.
이전에는 사자와 호랑이들과 같은 맹수들을 인간이 만들어 낸 발명품으로 쉽게 제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이 먼길을 돌아서 가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도록 산도 뚫어서 지름길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의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통제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제 인간은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연의 모든 질서와 원리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알아야 할 원리도 없다.
천상의 법칙 (케플러)과 천하의 법칙(갈릴레이)을 합친 만유인력과 뉴톤법칙만 있으면 더 이상의 법칙이나 원리 따위는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에 군림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과학이 점점 발달할수록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과학이 발달하여 더 작은 입자의 세계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아원자 입자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와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함께, 정확하게는 알 수 없도록 되어버렸다.
왜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모두 알 수 없는가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어떤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와 얼마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만 알면 1시간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거시세계(인간생활 세계)에 익숙한 사람은 동시에 두 가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여간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근원적인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아원자의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함께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하나의 사실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늘날 이 사실은 인류에게 하나의 원리로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모든 것이 예측이 가능하고 자신의 손안에 쥘 수 있을 것만 같던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전지 전능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자연은 본래부터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으로서 마치 안개에 싸인 성과 같은 존재이었다라고 고백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확신하였던 자신의 확신을 그 근본부터 의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전지 전능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2. 불확정적인 부분
인간이 불확정성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생활에 변화가 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총과 대포를 사용하고, 여전히 행성의 미래를 예측한다.
인간이 피부로 느끼는 생활의 변화는 전혀 없다.
우리는 이제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을 우선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것이기에 이토록 인류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실제로는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인간이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인가를 혼돈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상세히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을 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인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이 원리가 보여주는 일반계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도 살펴 볼 것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서술에 들어가 보자.
현재 우리가 살펴 보려 하는 것은 '미시 세계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 또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 라는 것인데 여기서 미시세계라함은 원자나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를 의미한다.
실제로 이 세계를 우리는 볼 수 없다.
대충 사람이 지구만큼 커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원자는 커지지 않은 현재 사람 정도의 크기가 될 것이다(실제로는 이보다 작다).
사람 대 원자, 이것은 지구대 사람보다 더 차이가 크다.
이 정도로 미세한 세계를 논하므로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상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습관의 누적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거시세계(인간세계)에 익숙한 인간들의 상식으로 볼 때 원자의 세계는 너무나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인간들의 편견이며 아집이다.
아무리 이상한 현상도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곧 그것을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원자의 세계는 너무나 비상식적이다.
너무나 비상식적이어서 사람의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할 것도 같다는데 동의를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수백년 전만 해도 하늘은 하늘대로 끝없이 펴져있고 땅은 땅대로 끝없이 넓게 퍼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밑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땅이 평평하고 물체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끝없이 펼쳐진 땅 위에서 살아왔으며 항상 물체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어떤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사고방식 내지는 상식이지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것이 상식이 되지 못한다.
땅은 둥글며 지구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보았을 때 물체가 위로 떨어진다.
완전한 상식의 배신이다.
평평하다고 믿었던 땅은 완전히 인간을 농락한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발을 딛고 사는 이 지구는 정말로 우주에서 초미세한 한 부분의 특수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즉, 우리는 대단히 작은 부분을 알고 이 세상 전체를 판단해 버린 것이다.
지구라는 지극히 편협된 공간보다는 물체를 놓아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넓은 우주가 이 세계에서의 보편 타당한 공간이다.
이 지구라는 것은 우주 전체에 비해서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한 작은 세계에서의 법칙과 현상으로 우주 전체를 규정지으려는 시도는 엄청나게 무례한 것이다.
오늘날의 인류에게는 고대인보다 우주를 설명하는 보다 나은 설명 방법이 존재하는가?
오늘날 우리의 상식과 과학이 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척도가 될 수 있는가?
과거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뉴톤역학자 같았다면, 모든 것을 알았다고, 우주는 이러이러하다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첨단과학은 자연이 이러이러하다고, 우주가 이렇게 생겼다고 자연의 원리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적어도 불확정성의 원리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이 불확정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자연을 우리가 철저하게 알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우리는 자연의 오묘하고 신비한 여러 가지의 모습 중 일부만 보았을 뿐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에서 현재의 과학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든지, 상식이 곧 진리인 듯이 생각하는 시각은 이 글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잠시 보류해야 할 것이다.
이 세계가 얼마나 우리의 편협적인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서 저 멀리 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불확정' 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확정적으로 규정지어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말이고, 이 말에 원리가 붙어서 '불확정성의 원리'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원리적으로 본질적으로 자연은 불확정적이어서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불확정성의 원리는 '이러이러할 것이다' 라는 이론도 아니고,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라는 觀도 아니고 가설은 더 더욱 아니다.
자연의 가장 기저에 깔려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과학 문명이 발달한다고 해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의 행동양식 중 가장 원천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고전적인 방법을 통해, 편협 되기는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식(=뉴톤역학)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광원에서 빛이 나와 물체에 반사되어 우리의 눈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았다' 라고 말한다.
이때 무엇을 보게 하는 매체는 빛이다.
문제는 빛이 "물체에 부딪혀" 눈에 들어와야 한다는데 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보면, 커다란 쇠로 된 공을 야구공으로 던져 맞힌다고 생각해보자.
이 쇠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으로 우리가 어떤 물체를 관찰하는 과정과 완전히 같다.
거대한 쇠공은 일반 물체이고 이 야구공은 빛의 입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야구공으로 탁구공을 맞힌다고 생각해 보자.
탁구공은 야구공에 맞아 어디로 가 버렸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야구공에 해당하는 빛이 우리의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눈에 빛이 돌아오지 않으며 설사 돌아온다 하더라도 탁구공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다.
그래서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가장 쉬우면서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서술 방법 자체가 아직도 고전적인 방법을 통하여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각은, 물질을 고전역학이라는 방법으로 부분적으로 보는 시각이며 보다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을 가지는게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이제 우리가 홍길동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 본다고 해보자.
'갑' 이라는 사람은 홍길동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매우 씩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고, '을' 이라는 사람은 홍길동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키가 큰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병' 이라는 사람은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고 하자.
그러면 씩씩하다거나 키가 크다거나 현명하다고 한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인가?
이 세 가지 설명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중 홍길동이란 인간이 가진 외면적, 내면적 혹은 잠재적 성향은 너무나도 많이 있다,
몸무게가 얼마이다,
나이가 얼마다,
농담을 잘한다 등등의 설명은 홍길동이란 인간의 일부분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이런 한 외면적, 내면적 설명들이 인간의 일부분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 홍길동이란 인간을 100% 설명하지는 못한다" 라는 것이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 보편적인 말은 '어떤 물질의 입자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이 말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질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위의 설명에서 '홍길동은 현명하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보다 더 성숙한 방법과 관점으로 물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은 물질이 이렇다, 저렇다고 단편적이고 편협적인 용어들로 자연과 물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본질을 우리 피조물이 완벽하게 알수없음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우리가 보는 과학적 관점과 상식이 이 세상을 설명하는 전부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진실하게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왜 이러한 논리적 귀결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하여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의 시각으로 자연을 설명하지 말고 보다 열린 시각과 솔직한 마음으로 물질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의 본격적인 내용은 "보이는 허상과 보이지 않는 실체"편에서 살펴 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산길을 산책하고 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푸른 물을 담고 있는것 같고 주위는 온통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발에 채이는 돌은 우리의 오랜 친구들과도 같이 느껴진다.
자연은 살아 움직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다.
이러한 자연들은 항상 우리에게 많은 즐거움과 신선함을 준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나 감동 없이 그냥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과연 이들은 생활에서 찌든 우리들의 권태를 해소하는 한낱 하나의 유희물에 불과한가?
아니면 자연은 스스로 거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인간은 스스로 '자연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연은 늘 변화하고 어떤 방향으로든 진행되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최근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각박하게 달려왔다.
인간들은 자연을 돌아보면서 일반계시적 차원에서 자연을 통하여 피조물의 모습을 깨달아 하나님을 아는 데 힘쓰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연을 이용하여 왔다.
무심코 지나쳐 버리지만, 자연을 보고 감탄할 것은 너무나 많다.
자연의 웅대함에 감탄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리고 자연의 변화무쌍함에 감탄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감탄하면서 살아도, 감탄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자연이 너무나 비범하고 비상식적이며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감탄한다.
실로 우리의 주변은 매일 놀라와 할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우리 자신들이 자연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너무나도 잘 알아서 실제로 인간 생활에 유익하도록 자연을 조정해 나가기도 한다.
나무로 집을 짖기도 하고,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댐을 건설하기도 하고, 바람의 성질을 잘 조사해서 비행기로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나무와 쇠도 잘 이용하면 물에 뜬다는 것을 알고 강이나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을 잘 알고, 잘 이용하여 산과 들, 바다, 하늘, 그야말로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을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을 이용할 줄만 알 뿐이다.
어떤 것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냉장고를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장고가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 음료를 차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냉장고 문만 열면 언제든지 시원한 음료를 마실 수가 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냉장고를 잘 사용한다고 해서 냉장고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인가?
이 사람은 냉장고의 실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 등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것은 자연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진다.
인간들이 자연 속에서 살고, 자연을 호흡하고, 자연을 이용한다고 해서 절대로 자연을 알 수 없으며 더욱이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심성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잘 알고 친숙해져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자연을 잘 모르고 있다.
다만,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의 혜택만 받을 뿐이다.
이용하는 기술이 뛰어나다고(실제로 요즈음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TV가 출하되어 그 기능을 다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TV를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을 잘 알고 있는가?
현대 과학자들은 '그렇다' 고 대답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다.
"옛날에는 신의 저주로만 생각했던 번개와 천둥을 이제는 인간이 그 실체를 알아 피뢰침을 만들어 번개를 피하는 방법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인간은 로케트를 달나라까지 쏘아 땅이 둥글다는 것도 알아내지 않았는가?
또한 하늘에 희뿌옇게 생겨 꼭 강을 닮은 은하수가 실제로는 별들의 무리라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는가?
얼마나 인간이 위대한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담과 같이 가죽옷을 입고 생활하던 때부터 땅은 둥글게 생겼었고 은하수는 별들의 무리였다.
인간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어린 아이가 이제 겨우 TV를 켜고 끄는 방법을 알고나서 마치 TV를 자신이 발명한 것인 양 우쭐대는 것과 같다.
이 어린 아이가 깨닫기 이전부터 TV는 버튼만 누르면 켜지게 되어 있었다.
TV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복잡한 원리에 비하면 이 아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극히 일부분이다.
어린 아이가 TV박스를 뜯어 안을 보게 된다면 그 복잡한 회로들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울 것이다.
오늘날 최첨단의 과학이 마치 이와 같은 현상이다.
TV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이라면 어린아이가 알게 된 TV를 켜고 끄는 방법은 인간의 최첨단 과학이다.
오늘날 인간은 자연을 조금 이용할 줄 안다고 해서 기고만장(氣高萬丈)해 마치 자신이 자연을 만든 창조주쯤이라도 되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알아낸 지식은 자연의 본질중 그야말로 일부분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하이젠베르그에 의해서 발견된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 물질의 극한 부분에까지 도전하여 자연의 본성을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거에 알고 있었던 어떠한 지식보다도 폭은 넓어졌고 깊이는 깊어졌다.
무와 유가 혼돈된 세계까지 인간의 탐구열이 미치고 있다.
그러나 깊이 알면 알수록, 연구를 하면 할수록, 인간지식의 단편성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연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주다가 결국에는 '자연을 완전히 알 수 없다' 는 것을 인간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해버리는 것이다.
자연의 본질이 인간의 손에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 하면 잡으려 할수록 더 멀리 도망간다.
오늘날의 전반적인 과학의 흐름은 실용과학쪽으로 흐르고 있다.
미시세계나 거시세계를 끊임없이 연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생활에 유익하도록, 실용과학의 세력이 점점 커져간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TV가 신기해서 TV를 뜯어 보기도하고 두들겨 보기도 하다가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TV 알기를 포기하고 열심히 TV를 시청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무엇이 이 아이로 하여금 도전의욕을 포기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의 문턱이 높음을 보여 주었는가?
그것을 명백히 보여준 것 역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자연의 본질을 항상 다른 모습으로 일부분만 보여준다.
그러나 결코 전부를 보여 주지 않는다.
인간으로서는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 가 인간의 탐구욕에 한계를 그어 준 것이다.
이로 인하여, 결정론적 사고와 합리적 논리를 신봉하던 서구의 철학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사상 체계와 철학적 구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구조적 사고구조는 서구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의 반대쪽 동양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동양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고 속에서도 직관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유추와 초월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새로운 과학구조 즉, 불확정성의 원리에 맞는 해석의 시각을 아무리 찾아도 없었는데 동양에서는 그것이 일상생활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거 결정론적 사고는 서구인들에게 적합했지만 보다 진실에 가깝고 포괄적인 자연에 대한 인식은 동양인들의 사고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제 새로운 과학의 시대, 새로운 사상의 시대는 동양인들의 심성 깊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태초부터 주관하셨고 오늘날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도록 사역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그 문제의 원리와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 볼 것이다.
Ⅱ. 확정적인 부분과 불확정적인 전체
1. 확정적인 부분
우리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물체의 움직임에 대하여 모호한 예측을 하지 않는다.
나무의 딱딱한 감각과 물의 액체와 같은 성질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살아간다.
탁상 위에 놓아둔 꽃병은 며칠이 지나고 그대로 탁상 위에 있으며 어떠한 외부의 힘을 주지 않는 한 영구히 그곳에 존재한다.
이와 같은 일상적인 믿음들은 사실상 결정론이라 불리는 고전역학에 기초한다.
결정론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금 설명을 가하자면 아래와 같다.
10 이라는 힘으로 밀면 정확하게 10의 크기로 밀려가고, 5정도의 힘으로 당기면 반드시 5정도의 크기로 당겨져온다.
이것은 너무 정확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다.
낙엽이 바람에 날려갈 때 그 바람의 크기와 방향만 알면 낙엽이 어디에 떨어질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우리가 낙엽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것은 단지 크기와 방향을 정확하게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외에는 별 이유가 없다.
또한 태양이 어느 때에 뜨고 달이 어느 때에 지며, 혜성이 몇 년 후에 지구에 다시 가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알아낸 법칙에 정확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이들의 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힘만 있으면 그들을 제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도 별로 신비로운 것이 못된다.
인간은 주변의 다가오는 환경에, 즉흥적으로 대처할 뿐인데, 이 주변의 환경들이라는 것은 인간이 알아낸 위대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반응도 결국은 이 법칙에 지배를 받는 단순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전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일 뿐이다.
이 기계는 뉴톤의 법칙이라는 우주 최고의 법률에 맞추어서 진행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 태양은 큰 톱니바퀴이며 지구는 조그마한 톱니바퀴이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맞추어져 끼워져 있는 작은 나사에 불과하다.
우주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 법률을 지키며 돌아가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연구할 것도 없다.
우주는 이 위대한 법칙의 현장일 뿐이다.
인간의 감성이라든지 낭만 그리고 사랑과 같은 단어들은 단지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TV를 켜고 끌줄 모르던 시절에 비하면 굉장한 발전이다.
과학을 전혀 모르던 인간들이 이제 겨우 과학에 눈을 뜨고나서 보니, 자신이 무엇인가를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포나 총이 발견되기 이전에 인간들은 돌멩이나 창으로 적을 대항하였다.
그러나 대포나 총이 발명되면서 이들을 대치하였다.
총이나 포의 원리가 어떠하던가?
화약이 낼 수 있는 힘과 방향만 정확하게 조준하면 아무리 멀리 있는 물체라도 맞힐 수가 있다.
대포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적군은 산 넘고 물 건너 아주 멀리 있는데도 몇 미터의 착오도 없이 공격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것은 뉴톤역학의 위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뉴톤역학의 위력을 맞본 사람은 그것을 거의 신격화시켜 버렸다.
너무나 자신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 법칙으로 설명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개미가 먹이를 먹고 기어가는 것에서부터 거대한 행성이 오묘하게 서로 충돌하지 않고 운행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이 결정론적 사고방식의 대충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뉴톤역학을 과신한데서 온 부정적인 현상이다.
어느 면에서 볼 때 정말로 뉴톤역학은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조사해서 자료만 많이 모아지면 세상에 그 무엇도 이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알고 있는 것만큼 통제도 가능하였다.
이전에는 사자와 호랑이들과 같은 맹수들을 인간이 만들어 낸 발명품으로 쉽게 제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이 먼길을 돌아서 가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도록 산도 뚫어서 지름길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의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통제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제 인간은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연의 모든 질서와 원리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알아야 할 원리도 없다.
천상의 법칙 (케플러)과 천하의 법칙(갈릴레이)을 합친 만유인력과 뉴톤법칙만 있으면 더 이상의 법칙이나 원리 따위는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에 군림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과학이 점점 발달할수록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과학이 발달하여 더 작은 입자의 세계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아원자 입자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와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함께, 정확하게는 알 수 없도록 되어버렸다.
왜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모두 알 수 없는가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어떤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와 얼마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만 알면 1시간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거시세계(인간생활 세계)에 익숙한 사람은 동시에 두 가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여간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근원적인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아원자의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함께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하나의 사실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늘날 이 사실은 인류에게 하나의 원리로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모든 것이 예측이 가능하고 자신의 손안에 쥘 수 있을 것만 같던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전지 전능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자연은 본래부터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으로서 마치 안개에 싸인 성과 같은 존재이었다라고 고백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확신하였던 자신의 확신을 그 근본부터 의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전지 전능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2. 불확정적인 부분
인간이 불확정성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생활에 변화가 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총과 대포를 사용하고, 여전히 행성의 미래를 예측한다.
인간이 피부로 느끼는 생활의 변화는 전혀 없다.
우리는 이제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을 우선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것이기에 이토록 인류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실제로는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인간이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인가를 혼돈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상세히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을 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인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이 원리가 보여주는 일반계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도 살펴 볼 것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서술에 들어가 보자.
현재 우리가 살펴 보려 하는 것은 '미시 세계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 또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 라는 것인데 여기서 미시세계라함은 원자나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를 의미한다.
실제로 이 세계를 우리는 볼 수 없다.
대충 사람이 지구만큼 커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원자는 커지지 않은 현재 사람 정도의 크기가 될 것이다(실제로는 이보다 작다).
사람 대 원자, 이것은 지구대 사람보다 더 차이가 크다.
이 정도로 미세한 세계를 논하므로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상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습관의 누적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거시세계(인간세계)에 익숙한 인간들의 상식으로 볼 때 원자의 세계는 너무나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인간들의 편견이며 아집이다.
아무리 이상한 현상도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곧 그것을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원자의 세계는 너무나 비상식적이다.
너무나 비상식적이어서 사람의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할 것도 같다는데 동의를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수백년 전만 해도 하늘은 하늘대로 끝없이 펴져있고 땅은 땅대로 끝없이 넓게 퍼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밑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땅이 평평하고 물체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끝없이 펼쳐진 땅 위에서 살아왔으며 항상 물체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어떤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사고방식 내지는 상식이지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것이 상식이 되지 못한다.
땅은 둥글며 지구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보았을 때 물체가 위로 떨어진다.
완전한 상식의 배신이다.
평평하다고 믿었던 땅은 완전히 인간을 농락한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발을 딛고 사는 이 지구는 정말로 우주에서 초미세한 한 부분의 특수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즉, 우리는 대단히 작은 부분을 알고 이 세상 전체를 판단해 버린 것이다.
지구라는 지극히 편협된 공간보다는 물체를 놓아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넓은 우주가 이 세계에서의 보편 타당한 공간이다.
이 지구라는 것은 우주 전체에 비해서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한 작은 세계에서의 법칙과 현상으로 우주 전체를 규정지으려는 시도는 엄청나게 무례한 것이다.
오늘날의 인류에게는 고대인보다 우주를 설명하는 보다 나은 설명 방법이 존재하는가?
오늘날 우리의 상식과 과학이 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척도가 될 수 있는가?
과거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뉴톤역학자 같았다면, 모든 것을 알았다고, 우주는 이러이러하다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첨단과학은 자연이 이러이러하다고, 우주가 이렇게 생겼다고 자연의 원리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적어도 불확정성의 원리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이 불확정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자연을 우리가 철저하게 알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우리는 자연의 오묘하고 신비한 여러 가지의 모습 중 일부만 보았을 뿐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에서 현재의 과학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든지, 상식이 곧 진리인 듯이 생각하는 시각은 이 글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잠시 보류해야 할 것이다.
이 세계가 얼마나 우리의 편협적인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서 저 멀리 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불확정' 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확정적으로 규정지어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말이고, 이 말에 원리가 붙어서 '불확정성의 원리'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원리적으로 본질적으로 자연은 불확정적이어서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불확정성의 원리는 '이러이러할 것이다' 라는 이론도 아니고,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라는 觀도 아니고 가설은 더 더욱 아니다.
자연의 가장 기저에 깔려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과학 문명이 발달한다고 해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의 행동양식 중 가장 원천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고전적인 방법을 통해, 편협 되기는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식(=뉴톤역학)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광원에서 빛이 나와 물체에 반사되어 우리의 눈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았다' 라고 말한다.
이때 무엇을 보게 하는 매체는 빛이다.
문제는 빛이 "물체에 부딪혀" 눈에 들어와야 한다는데 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보면, 커다란 쇠로 된 공을 야구공으로 던져 맞힌다고 생각해보자.
이 쇠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으로 우리가 어떤 물체를 관찰하는 과정과 완전히 같다.
거대한 쇠공은 일반 물체이고 이 야구공은 빛의 입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야구공으로 탁구공을 맞힌다고 생각해 보자.
탁구공은 야구공에 맞아 어디로 가 버렸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야구공에 해당하는 빛이 우리의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눈에 빛이 돌아오지 않으며 설사 돌아온다 하더라도 탁구공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다.
그래서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가장 쉬우면서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서술 방법 자체가 아직도 고전적인 방법을 통하여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각은, 물질을 고전역학이라는 방법으로 부분적으로 보는 시각이며 보다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을 가지는게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이제 우리가 홍길동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 본다고 해보자.
'갑' 이라는 사람은 홍길동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매우 씩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고, '을' 이라는 사람은 홍길동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키가 큰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병' 이라는 사람은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고 하자.
그러면 씩씩하다거나 키가 크다거나 현명하다고 한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인가?
이 세 가지 설명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중 홍길동이란 인간이 가진 외면적, 내면적 혹은 잠재적 성향은 너무나도 많이 있다,
몸무게가 얼마이다,
나이가 얼마다,
농담을 잘한다 등등의 설명은 홍길동이란 인간의 일부분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이런 한 외면적, 내면적 설명들이 인간의 일부분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 홍길동이란 인간을 100% 설명하지는 못한다" 라는 것이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 보편적인 말은 '어떤 물질의 입자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이 말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질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위의 설명에서 '홍길동은 현명하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보다 더 성숙한 방법과 관점으로 물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은 물질이 이렇다, 저렇다고 단편적이고 편협적인 용어들로 자연과 물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본질을 우리 피조물이 완벽하게 알수없음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우리가 보는 과학적 관점과 상식이 이 세상을 설명하는 전부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진실하게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왜 이러한 논리적 귀결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하여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의 시각으로 자연을 설명하지 말고 보다 열린 시각과 솔직한 마음으로 물질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의 본격적인 내용은 "보이는 허상과 보이지 않는 실체"편에서 살펴 볼 것이다.)
출처 : 하나님(Logos)의 존재와 속성을 아십니까?
글쓴이 : 찬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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