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마다 대중 매체들이 5월 스승의 날이 가까와지면 교사의 촌지 문제로부터

교사들의 자존심을 붉게 물들게 하는 기사를 계절풍처럼 쏟아붓는다.

 

올해도 역시 계절풍은 멎지 않는다.

 

그래서 인지 스승의 날을 편하게 지낼 수 없게 된 판국이라

그래도 스승의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적어도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교사로서는 365일이 스승의 날이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뭐 따로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래의 글에서는 새롭게 스승의 날을 생각하게 하는 관점이 있어서 소개해 본다.

 

다음은 한겨례 신문 2006년 4월 20일(목) 31면에 실린 기사의 일부입니다.

 

-'스승의 노래'는 환상 존경심 없는 게 학생 탓이랴

<듀나, 영화평론가, 소설가>

 

올해부터 서울지역 초중고 학생들은 스승의 날에 학교에 가지 않는다. 교총에서 스승의 날을 자율휴업일로 정한다고 정한 게 작년 일

 ‘이 날만 되면 촌지수수 등 교육부조리 문제가 거론됨으로써 오히려 교권이 떨어지고 교직사회의 신뢰가 추락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라는 데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에겐 더 멋진 아이디어가 있다. 스승의 날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공식 행사에서 스승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처음부터 금지하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진지한 발언이다. 냉소주의를 깔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어법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논리는 자명하다. 교직에 종사하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스승이란 불필요하게 높은 단어다. 교사만으로도 충분하고 많은 사람들은 종종 그 단어에도 못 미친다.

그렇다면 교사란 무엇인가? 별거 아니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애들을 가르칠 만한 기초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자기들을 성추행하거나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구타하거나 엄마, 아빠한테서 뇌물을 뜯어먹지만 않아도 아이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자. 세상엔 이런 기준도 넘어서지 못하는 교사들은 넘쳐난다. 그걸 내가 억지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스승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인간 쓰레기들에 대한 공포담을 서너 개 이상 알고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직접 몸소 체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직업에 어울리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기준을 강화하고 교육을 시키고 적절한 환경을 만들고 부적절한 인물들을 솎아내는 것이지,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을 스승이라고 부르게 강요하고 지킬 수도 없는 기준을 만들어 억지로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권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필요한 건 스승이 아니라 제대로 된 환경 속에서 정상적인 직장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교사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스승이라는 단어와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야 말로 대한민국 ‘스승 공포담’과 교권 추락의 진짜 원흉이다.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일에는 단계와 한계가 있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다.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건 노력과 실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스승의 은혜’가 강요하는 기준이 불가능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습관적으로 낭송하지 말고 그 가사를 한 번 의미를 되새겨가며 읽어보라. 황당하기가 무협물 주제가 같다.

교사는 존경받을 필요 없다. 자기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존경받는 교사가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건 강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교사가 인격적으로 뛰어나다면 사람들은 존경하지 말라고 해도 그 사람을 존경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한 존경을 강요한 적 없고 노인네들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다. 지금의 우리 학교는 정반대이다. 존경의 대상이 없는 시스템 속에서 존경에 대한 강요와 자화자찬만이 존재한다. ‘스승의 은혜’에 대한 판타지만 제거되어도 교권 회복의 반 이상은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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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스승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여 전문가로서의 교사상을 확보하자는 좋은 의견이다.

교직관에는 성직관, 전문가관, 노동자관 이렇게 대체로 3개의 관점이 있다.

스승은 대체로 성직관에 어울리는 칭호일 것이다. 교사는 그냥 전문가관과  노동자관에 어울린다. 도대체 교사가 왜 스승이어야 하는가? 요즘은 선생님이 너무 많아서

학교의 아이들이 스승의 날에 준비해야 할 꽃의 수가 한 두개가 아니다.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과외 선생님, 학습지 선생님, .........................

 

스승에 대한 환상은 무엇인가? 교사가 꿈꾸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교사 만이 아니라 아이들, 그리고 학부모들, 그리고 이 사회가

꿈꾸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꿈에서 [깨몽]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꿈꾸며 살아간다. 적어도 현실을 살아가려면 미래라는

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이 사회가 꿈꾸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다른 날은 다 못해도 하루라도 아 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꿈꾸어야 할 교사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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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머리를 두고 오늘의 현실을 밟아가는 사람이다.

 

그냥 교사를 하려고 해도

너무 어렵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자기들의 교사로 알고

이뻐해 주니까 나는 저들의 교사로서 하루를 살아간다.

이 아이들이 나를 교사로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비록 한 아이가 나를 자기의 선생님으로 그리고 교사로

그리고 단순히 먼저 나서 세상 물정을 먼저 안 사람이나

가르칠 것이 있어서 가르치는 직업가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서 바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을 함께 배우며 가르치며 손잡고 가는 사람으로서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지만 함께 옳은 것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아이의 심정에서 이해하고 

단지 하루가 아니라

365일을 변함없이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이 아이들과

손잡고 갈 수 있는가?
무엇을 이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가?

 

나는 365일이 스승의 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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