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키운다면 (14) / 최대규

교육엔 본성(DNA)과 양육(환경)이 모두 중요하다. 두 요인이 상호작용하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고, 잘못 가면 반작용으로 뒤틀림 속에서 헤매게 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모두에 대해 서로 환경요인으로 작용한다. 그 역동성을 요즘 복잡계 이론이 엄청난 슈퍼컴의 도움을 받아 추론해내고 과정변인과 매개변인을 통제하여 어떤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쉽지 않은 시도이지만 그런 모색과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 더욱더 자신과 비호그룹 속에 갇히지 말고 더 공개된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이 긍정적으로 미치는 환경과 생활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개인은 독특하다. 귀하다. 장애인 한 사람도 그가 사람으로서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이니 소중하다. 그의 사회적 기여가 있어야 존재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말미암아 사회적 기여의 공간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을 인식하고 사회와 개인이 서로를 위해 열려있을 때 장애인도 비장애인 못지않게 아니 어떤 점에서는 비장애인의 필요를 넘어서는 기여를 사회에 끼치게 된다. 진정 삶이 무엇이고 사람이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사는 지를 이 왜곡이 넘치는 현실 속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다.
사랑의 관점에서 사람과 사회를 보면 불행이 행복으로 변하게 된다. 미움이 변하여 이뿜이 된다. 아픔이 변하여 온전함이 된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 죽음이 변하여 삶이 된다.

그러나 사랑의 반대인 자기 중심의 욕심으로 사람과 사회를 보게 되면 모든 게 반대가 된다.
이웃이 잘 되는 게 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나에게 슬픔과 아픔이 되고 나에게 손해가 된다.
어떻게 해서든 이웃을 깎아 내리 눌러서 그들 위에 올라서야 한다. 모든 지향이 그리 움직이게 되니 칼날같은 삶을 살게 된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상처를 입히고 가까이 하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리 복잡계 이론으로 교육을 정교하게 시스템화해도 삶의 지향이 자기 중심적이 되면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보다는 자기만 배부른 돼지들이 되고 말 거다.
돼지에게는 미안한 표현이다. 돼지도 창조된 목적을 따라서 의미 있게 존재해가는데 인지편향으로 그릇된 이미지를 씌우고 말았다.

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 배부른 돼지가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판을 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좋은 교육 제도를 시스템화해도 결국 배부른 돼지밖에 나올 것이 무엇이겠는가?
너는 배부른 돼지가 한번이라도 되어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배고픈 돼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에 불과하지 않는가?
아무리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지향한다해도 DNA가 돼지인데 어떻게 그렇게 되려고 하는가?
그런 시도 자체가 편견을 확대하고 심화시킬 뿐이다.
그런가?
어떻게 소크라테스를 말하게 된 것이지?

환경과 유전의 상호작용의 필연성과 중요성을 알게 된 현재,
어느 것도 사람이 생각하는 만큼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언어라는 상징도구에 갇혀서 사실을 경직되게 이해하고 생각하게 되는 점을 주의하자.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라는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작용에 대해 열려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 언어의 상징체계 속에서 결정론의 늪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꿈을 꾸어야한다.
생명의 꿈을 꾸어야한다.
흑암 속에 있다하더라도 곧 아침이 밝아옴 잊지 않도록 꿈을 꾸어야 한다.

내 꿈은 아침입니다 / 최대규

아이들과 함께 배우기
뫼와 가람
세 번 바뀔 쯤 되어요.

몸 낮추면
동무 되고
눈 마주 하면
마음이 통해요.

온 세상 향해
내가 열리고
어느새 어둠 지고
새벽이 밝아옵니다.

내 꿈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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