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주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소경(3)

 

주를 믿고 사람 앞에서 시인한 소경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기를 '선지자입니다' 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는 분으로 믿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잘 알던 사람 같지 않은데,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에서 이렇게

추론하여서 '아, 이 사람이 선지자'하고 깨닫고 대답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자기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아니까, 그리고 이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고 하나님의 교훈을 배운 것이 있으니까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소경된 사람이 상당히 탐구적이고 이스라엘의 전통적 신앙에 대해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경된 사람으로서 생각이 많고 깊었던 사람이다.

그냥 허렁뱅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신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평소에 배운 교훈이 있으니까 이렇게 정당한 추론을 하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해보면

이 소경이야 말로 정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42쪽 (이 소경된 사람의 부모의 태도가 문제다.)

바리새인들이 이 부모를 불러서 물었다.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십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요 9:19-21)

 

이게 무슨 말인가? 자기 아들이 눈을 떴다고 와서 자기들에게 보이고, 예수라는 분이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이렇게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서 그들이 안 것이 아닙니까?

눈을 뜬 것을 알았을 때에 아들이 틀림없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것을 들어서 알 것이다.

 

그러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해서 널리 광고할만한 일이고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고 선지자다'하고 당연히 아들과 같이 말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밝히기를 꺼렸다. 그가 자기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나서 지금 눈을 뜬 것까지는 시인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고 그에게 물어보고 그가 클 만큼

컸으니까 자기 일을 말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입으로 그 기쁘고 고마운 일을 말하기를 피했다.

 

왜 그렇게 했는가?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요 9:22)

출교를 당하면 그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고 큰 불이익을 받게 되닌까 자기 아들이 은혜를 받은 것은 자기들이

받은 것이나 같을 텐데도 자기들이 안 대로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또 예수님께 감사의 말을 하기를 피했다.

 

이것이 그 부모와 아들의 차이점이다.

소경으로 있다가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다음 계속하여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말을 다 하였고,

그래서 그의 믿음은 더욱더 굳게 되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말하여 가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자꾸 확실해졌다.

그래서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으리이다."(요 9:30-33)

 

이 소경의 말로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악함을 잘 드러냈다.

바리새인들은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이 사람을 당할 수 없으니까 이제는 막말을 하고 권위주의적으로

대했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4절)

 

이 소경되었던 사람은 자기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하여 사람 앞에서 말하고 자기를 위하여 큰 능력을 행하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욕하고 쫓아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기 부모와 비교하여 아주 훌륭하게 행동하였다. 

 

그 부모는 마음 속으로는 예수님께서 불쌍한 자기 아들을 구원하시는 줄 알았겠지만 그것을 사람 앞에서

시인하기를 두려워하였다.

시인했다가는 자기들이 그 사회에서 쫓겨날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갈 길이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시인하기를 주저하고 시인하지 않았다. 사람을 두려워 한 것이다.

 

그 부모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믿고 감사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부모가 되어서 그런 마음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입으로 시인하기를 두려워했다. 이러한 믿음도 마음으로 믿었으니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하신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인정해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 부모된 사람들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잠시 잘 살았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못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시인하여 주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를 시인하시고 믿는 자의 짐을 짊어지시는 것이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네 짐은 네가 져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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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촛점이 주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소경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결론 부분에서는 그 부모가 믿음을 명백하게 표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집중해서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 부모의 불명확한 믿음의 표명이 오늘날 나의 자녀 교육에 대해서 어떤 시사점을 가지는가?

오늘날 당시처럼 유대인들의 바리새인같이 그렇게 믿음의 표명을 위협하는 세력이 공식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과연 아이들을 양육할 때 이렇게 명시적으로 믿음을 표명하는 것이 분깃점인 순간에

믿음을 바르게 표명했던가? 조금 더 깊이있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입시의 문제 앞에서 나는 바르게 믿음을 표명해서 나의 아이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해 왔던가?

혼인의 문제 앞에서, 또 자녀 양육의 여러 상황에서 믿음을 바르게 표명했는가?

우상을 쫓아가지는 않는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믿고 나아가고 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신의 은혜로만 자녀교육을 하고 있는가?

참으로 반성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주님을 사랑함으로 자녀들을 사랑하고 믿음의 길에서 힘차게

걸어가도록 함께 나아갈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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