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교회에 대하여Ⅱ(김홍전 저, 성약출판사,2000년 12월 15일) 323-326쪽에서 정리한 글이다.


성신님의 역사와 신령한 생활이란 뭔가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성신으로 말미암은 생활의 도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상(像 )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적 노력에 의해서 종교의 어떤 요구를 이루어 보고 거룩하게 되어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자기의 종교적인 노력에 크레딧(credit)을 두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교적인 노력을 늘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짧게 하는 것보다 길게 하면 훨씬 더 의미 있고 짧게 기도한 사람보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간 것같이 생각하는 묘한 잠재의식(complex), 기이한 아상(我相)이라는 것이 속에서 움직입니다. 그런 것이 깨끗하게 없어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가치의 판단에서 잘못된 것들이 그냥 도사리고 앉아서 지배하는 까닭입니다. 종교적인 노력을 좀더 하면 복을 더 받는다. 요컨대 공을 좀더 쌓으면 그만큼 더 여경(餘慶)이 있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 것은 신령한 생활과는 먼 이야기입니다. 아상이 없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과는 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인류의 역사 위에서 어떻게 통치하고 나아가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고 어떠한 역사를 요구하시는가? 요컨대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문제인데,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 대해서 너무도 소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왕으로서 어떻게 통치하고 계신가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히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치한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한 다음에 땅 위에 세울 나라만 자꾸 생각했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치중해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을 무시해 버린 채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내가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오늘 현실의 존귀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 생전에 얻을는지 말는지에 대한 문제에만 치중하고 오늘 당장 예수를 믿고 살아가면서 존재하는 동안의 존귀한 가치, 인간으로 존재했을 동안의 소중한 가치를 그만 상실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합쳐 가지고 거룩한 인격자로 서서 활동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치입니다. 그것을 소홀히 생각하고 육신과 영혼이 분리해서 영혼만 가 있는 세계만을 사모한다는 것은 아주 그릇된 생각입니다.

 

“천당, 천당”할 때 그것은 흔히 죽은 다음에 가는 낙원(樂園)을 말하는데 성경은 그것을 이 세상보다 더 의미 있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위 경과의 과정(intermediate period)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해 가지고 장차 완성할 영화(榮化)의 사실, 부활한 다음의 사실입니다. 그것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결국 사상상 경중(輕重)을 뒤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창조되었으며 이 육신이 세상에서 죽는다든지 산다든지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고 있는 피안(彼岸)이라는 것은 사실상 무엇이고 그것은 과연 얼마나 영광스러운 나라인가? 우리에게는 잠시의 낙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영광의 나라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소망이요 큰 위로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에게도 그런 말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죽었으니까 천당 갑니다. 천당 갑니다”가 아니고,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과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로부터 친히 강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다 부활의 영화의 몸을 입도록 하신 것으로 위로를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이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과 평가, 가치 판단이 여러 점에서 너무 부족해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차곡차곡 풍성한 말씀을 고르게 잘 먹여서 건강하게 자라나가게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지 않을 때 이런 결핍과 빈곤이 생기는 것이지요.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운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려면 그 먹이는 진리가 명백해야 하되 그것은 진리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의 편언척구(片言隻句)만 가지고 자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성경이 풍부하게 가르친 큰 도리들을 깊이 있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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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하여 Ⅲ권을 읽고 있다. 교회에 대하여 배울수록 교회의 통일성과 거룩성과 보편성의 속성들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주께서 알려주시는 이 큰 진리들을 바르게 알고 주의 통치에 열복하여 힘써 나아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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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교회에 대하여Ⅱ(김홍전 저, 성약출판사,2000년 12월 15일) 322-323쪽에서 정리한 글이다.


다음에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하셨느냐 하는 구원의 목적에 대해서도 불분명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천당만 가면 그만이다.”하고 대단히 꾀바르고 잇속 밝은 생각만 하지 하나님이 나를 이와 같이 건져내 놓으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면이 너무 약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하나님 당신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해야 하는데 그런 태도가 빈곤하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목적에 대해서 알려는 것이 적고 “구원받았으니 좋다. 이제는 죽더라도 천당 가니 좋다”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똑똑한 신앙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가 무엇을 얻었다는 순전히 소유욕의 문제만 가지고 얘기할 때는 일반 종교로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믿음과 믿음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구원과는 상관없는 믿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들에 대해서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 중보의 직(職)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서 불분명합니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그 중에도 특별히 그의 왕권의 행사에 대한 문제가 대단히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왕은 이름만 왕이고 차함(借銜)만 왕이지 실제로는 지금 하늘에 피난하고 계신 것 같은 생각은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가령 우리의 교회 형성이라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가장 절대적인 조건인 중생의 문제, 그 중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합니다. 과거에 많은 목사들이 모여서 무슨 특별 집회를 하며 기도들을 열심히 하는데 거기서 공동기도할 때 조차 “주여, 중생하게 합소서. 중생하게 합소서”하는 말들을 하였는데, 그런 말을 지금도 하고 있는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목사까지 되어서 아직 중생이 안 되어 가지고 중생하게 해 달라고 한다면 참 큰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율법의 형식으로 나왔으나 무엇을 하라고 할 때에도 그것이 율법인데, 그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 명령을 듣는 대상인 ‘내’가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는 것은 미미한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과 나와의 관계가 예배에서도 심히 부족하게 이해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물론 부족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과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족으로 인한 결과와 범죄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달리 다루시는가, 이런 것들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죄’자(字)로 그냥 둘러씌우는 경향이 있고 모두 ‘죄’자로 둘러씌우니까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저 “사람이니까 할 수 없다.”하면서 마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가능성이나 부족을 갖다가 죄라는 말로 둘러씌우는 탓에 진짜 큰 범죄까지라도 용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렇게 죄악에 대한 명확한 태도가 부족합니다. 그러면 결국 그만큼 속죄의 의미를 희미하게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속죄라는 것은 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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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빈곤(2)

한국교회라는 일반적인 명사는 대단히 애매한 말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을 이름붙인 것에서 지역교회를 명시하는 것은 가능하고 필요한 일이다.

한국교회의 빈곤에 대한 말씀은 자신을 빼놓고 너희들만 그렇다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우리의 빈곤이요. 무엇보다 우리를 반성할 일이요. 주의 뜻을 분별하는 지침이 되어서 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전진해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슨 문제점만 지적하면 그것을 인용해서 써먹으려 하는데

그보다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게 하고 그 실체를 구현하는 일에 매진케 하려는 것이 강설의 핵심이다. 주의 능력은 죽은 자를 살리는 데서 온전해 진다. 정말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교회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전체를 다 드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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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전두환 군부의 폭압이 프로야구와 교복 자유화, 두발 자유화와 같은 교육 민주화라는 겉치레 속에서 상체기를 깊게 내고 있던 때였다. 1980년 6월

그 치열한 사회 상황에 대해서 말 한마디 없는 강설이 어쩌면 오늘의 우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그러나 김목사님의 강설은 한국 교회의 빈곤에 대해서 뼈 속 깊은 지적을 하신다.

다음은 교회에 대하여Ⅱ(김홍전 저, 성약출판사,2000년 12월 15일) 320-322쪽에서 정리한 글이다.



특별히 과거 한국 교회를 보면서 몇 가지 결핍된 점을 우리는 때때로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면 복음의 도리를 충분히 알아야 할 것인데 잘 모르고 있다는 것, 성신님께서 역사하시는 사실에 대해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 교회가 무엇인지 바로 모른다는 것, 은혜의 방도로 주신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라는 것을 궁극적으로 터득해야만 자기의 생활이라는 것이 낭비가 안 되고 의미 있게 될 텐데 그것을 잘 모르고 있기에 결국 예수를 믿고 무엇을 한다 할 때 대개 공리적인 종교적 요구에서 움직이는 일이 많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 교회 전체 안에서 우리가 그 동안 보아 오면서 느낀 부족이라는 것이 주로 그런 문제들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지적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의 부족입니다.

말씀의 해석을 바로 못 한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란 무엇인가, 말씀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 그 권위라는 것은 어떤 때 어떻게 행사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말씀을 파괴하고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기보다 맹목적으로 숭상만 하면 절대로 그것이 유용하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어떤 성(城) 속에다 가두어 놓고 지키기는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자기도 모르고 있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나타내느냐 하는 점, 그리고 그 말씀에서 우리가 터득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터득해야 하는 것인가 등에 대해서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와의 관계가 불분명합니다. 성경을 그냥 앉아서 읽고 지적으로 얻으면 되는 것같이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과 사람의 관계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흔천동지(掀天動地)하는 기조로 확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전파되고 말씀에 의해서 확실히 수립돼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르치실 때에도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받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늘 정상적인 것이라는 보장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기에 처음 어떤 행동에서는 “아, 과연 참 예수를 바로 믿고 은혜를 받았구나”하고 볼 만한 증거까지 가진 것 같은데, 일단 비 오고 바람 불고 창수가 나니까 넘어지고 말았다면 그런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충분히 받기는 받아서 자라는데 그 사람의 속에 정욕과 이생의 염려가 도사리고 있다가 길을 막아 버리니까 아무 열매 못 맺는다. 요컨대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여 순수한 심정에서 그것을 받지 못하는 까닭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관계를 가르치는 중요한 도리입니다. 대체 말씀이라는 것이 어떻게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냐 하는 이런 점이 빈곤하다는 말입니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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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님의 지적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에 대해 바르고 풍부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의 제한된 경험과 지식 속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가 너무도 쉽다. 그리고 현재적인 그리스도의 통치를 어떻게 받으며 살아가느냐? 하는 이런 그리스도인된 생명의 중요한 요체로서 열매 맺는 삶을 살기란 정말 어렵다.

무엇을 다 도통하고 나서야 무엇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므로 그 생명의 사실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또 알아가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로서 실증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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