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믿음(4)
제3강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믿음(4)
<믿음에는 준비를 잘 갖추는 것이 필요함>
62쪽 후에 얼마 있지 않아서 오순절에는 베드로가 많은 유대인의 무리 앞에 서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하고 아주 당당하고 담대하게 말하였다.
그때에는 준비가 잘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신 것임을
그는 잘 알았다. 이 준비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확실히 잘 아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베드로 사도는 후일에 믿는 자들을 격려하면서 말하기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15-16) 하였다.
이 대제사장의 집 뜰에 베드로 사도가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더라면, '네가 그의 제자가 아니냐?'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하고 대답하고,
'너희라도 저 의인에 대해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말라'하고
능히 경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더라면 그리스도의 권세와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안 이상에는
원수의 진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을 못할 리가 없다.
대제사장의 부하들, 칼과 몽치를 든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베드로가 잘 알고 마음의 준비가 되었더라면
'네가 그의 제자냐?'하고 물을 때에 '그렇다!'라고 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런 원수의 소굴에서 그렇게 말하다가는 당장 어떻게 당할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믿음이란 그런 지헤와 용기를 주는 것이다.
스데반이 그랬고 바울 사도가 그랬다. 그러니 베드로도 그렇게 못하라는 법은 없다.
다만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께서 왜 잡혀가시는지 생각을 안해 본 것이다.
그가 좀 조용히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으면 알 텐데도 그런 준비가 없었다.
준비없이 원수의 진영에 턱 가서 태평하게 앉아 있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참으로 영광스러운 증인 노릇을 할 수 있을 뻔 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이 거칠고 사나운 세상에 나가 앉아
있었던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약한 여종 하나가 와서 '당신,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하고 지적하자 그것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섭고 사나운 사람이 와서 칼과 몽치를 가지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냥 그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을 예수님꼐서
눈을 뜨게 하신 것도 보았고 바람과 바다를 말씀으로 잠잠케 하신 것도 이미 다 알고 마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약한 여자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으니 얼마나 허망하고 분한 일인가?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이렇게 되도록 만들었는가?
베드로는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고 그리스도를 몰랐던 것이고 자기를 사랑했던 것이다.
(주님 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모르고 결국 나를 사랑하여 죽지 않기 위해
온갖 핑게를 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하여 배반하기를 밥먹듯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까닭이다. 또 세상이 그만큼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에게 원수가 되고 사납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허둥지둥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예수님꼐서 그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시던 그 말씀이 번뜩 떠올라서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는 울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베드로를 먼저 만나시고 후에 열두 제자를 만나셨다.
베드로는 대체로 요한 사도와 함께 있었고 늘 함께 다녔는데 아마 이때는 혼자 있었던가 보다.
이 복음서에도 그렇게 기록되고(참조, 눅 24:34),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뒤에 시몬을 만나고, 그 다음에 열두 제자를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참조. 고전 15:5).
시몬이 혼자 있을 때 주님께서 만나신 것이다.
주를 잃고 주를 부인한 몸이라 그 슬픔을 혼자 간직할 수 밖에 없었고 어떤 친구와도 그것을
나눌 수 없었던가 보다. 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때를 위헤서는 아마 혼자 있는
것이 좀 더 적합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베드로가 용서를 받고 원위치로 회복되었지만,
영광의 주를 부인한 그 일은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외면하고 냉대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아주 역력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6, 28, 31; 눅 12:4; 요 14:27)하고 여러 번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하셨다. 바울 사도도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 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했다.
세상은 복음 전파의 일이나 믿는 일을 부끄러워하게 만든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참믿음이다.